[백양로]

 모두 익히 아시겠지만, 백양로에서 위당관 가는 길은 '마의 언덕'이지요. 이곳에선 다들 슬로우 모션에 익숙하지요. 처음엔 경사가 완만하니 누구든 한 달음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 만만히들 생각하지만 백기투항은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길이 끝나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고 한숨 좀 돌렸다 싶으면 이내 언덕이 턱하니 버티고 있으니 초행자들의 낭패야 응당 예정된 수순이라고 해야죠. 이러한 길의 위력은 ‘마의 언덕’인 종합관 언덕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제아무리 체력 좋은 청년일지라도 이곳에 이르면 팍팍한 다리를 두들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야트막한 구릉일 뿐인데 어디서 안나푸르나나 킬리만자로의 위엄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이하달 밖에요.

 나는 느림을 체질화시키는 그 길을 '동주로'라고 부릅니다. 길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윤동주 시비 때문이기도 하고 길을 쉬어 가는데 <서시>만큼 매력적인 동무도 없다 싶어 그리 한 것입니다. 항용 이런 종류의 경사길에선 마음이 몸을 앞서 걷게 되는 법이라서 걷는 모양도 영 빠지고 품위도 없는데다 더러 전투적이어서 추하기까지 하죠. 뿐더러 온몸이 땀에 젖는 불편은 물론 숨이 턱을 치고 올라오는 고통을 경험해야하죠. 그렇지만 나는 ‘동주로’에 서면 길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길의 흐름에 따라 호흡하고 걷고 생각하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간 몸은 빨리 걷는 일에 잘 단련돼 있어서 주변을 살필 여력도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마저 저만치 버려두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몸이 된 ‘동주로’는 나의 걸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너이냐. 그리고 너는 어디를 향하느냐.

 오감에 의해 포착된 ‘동주로’의 모든 것들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들이 있는 것을 상상하노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생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그 자명함에 이르게 됩니다. 타인의 헌신과 희생 없이 혼자의 힘만으로 살아온 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 페루의 시인 세자르 바예호를 만난 것도 ‘동주로’에서였고 인간과 인간에 대한 감응과 예의를 가르친 것도 ‘동주로’였습니다. 나의 대학 생활은 '동주로'가 나에게 묻는 말에 답하는 일이었을 것이니 ‘동주로’는 나의 스승이자 동지라고 밖에는 달리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전략)
내 몸의 뼈 주인은 내가 아니다
어쩌면, 훔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이에게 할당된 것을
빼앗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 대신 다른 가난한 이가 이 커피를 마시련만,
나는 못된 도둑...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중략)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누구에게든 용서를 빌고 싶다
그리고 여기 내 마음의 오븐에서 구워낸
신선한 빵 조각을 건네주고 싶다.
                    세자르 바예호의 <일용할 양식>부분

 이제 곧 졸업입니다. '동주로'와의 로맨스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승천하지 못한 자의 꿈은 아닐까 싶은 백양로의 노송들과, 참 끔찍한 몰골인 채로 사람들의 형편없고 잔인한 미의식을 폭로하듯 사람과 세월을 견디고 서 있는 본관 뒤편의 플라타너스들과, 그리고 강의실을 누볐던 경이로운 철학자들과 아직 415호 강의실에 남아있을 숱한 청춘들의 고뇌와도 안녕입니다.

 지난 대학생활 동안 이 길에서 내가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꿈에게 말합니다. 아주 나지막이 그러나 준엄하게 말이지요. 어쩌면 이후의 생은 '모두에게 용서를 비는' 생이겠고 그리하여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안녕, '동주로'는 고마웠어요.

이재은(철학ㆍ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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