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한민국 서울, 밤이 내려앉은 가운데 열띤 토론이 오가는 곳이 있다. 지난 19일 밤 130여분에 걸쳐 이뤄진 <100분 토론> 10주년 특별 생방송 스튜디오다. 이날은 지난 7년 11개월여 동안 <100분 토론> 진행자로 군림해온 손석희 교수의 마지막 방송이었다. ‘대한민국 시사토론의 역사를 바꿨다’, ‘토론의 역사는 손석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음은 이날 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논객들 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패널들의 입가를 뜨겁게 달군 주제는 ‘민주주의와 소통’이었고 나름의 논리로 엮인 답안들이 설전 속에 오갔다. 토론에서 토론을 다룬 것이다. 손 교수는 “토론은 민주주의 학습의 기본적인 장이다”라며 마지막 인사에서 토론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토론문화는 아직 과거지향적이다. 정답인냥 무거운 엉덩이를 비비며 자리를 지키는 고전의 눈치를 보랴, 창조적인 질문이 아니면 어쩌나 질문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는 우리네 강의실 풍경은 지루하다 못해 찌질하다. 대학, 큰 배움을 행하는 곳이라 할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L.H.O.O.Q」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는 뜻을 가진 다소 HOT(!)한 이 프랑스어 약자는 모나리자의 말간 살에 염소수염을 덧칠하고 뒤샹이 붙인 이름이다. 그는 엄연히 다른 시ㆍ공간적 가치가 지배하는 20세기에도 여전히 최고예술의 권좌에 머무는 16세기 르네상스의 모나라자를 공격했다. 이는 박물관 조명아래 박제화된 고전, 즉 절대적 가치에 대한 조롱이었다. 동감이다. 시간의 변덕이 하늘을 찌르는 현대사회에서 절대 진리, 답은 없다. 절대자가 없는데 그 창조물은? 그것이 온전히 새로운 것이어야만 할까? 이 시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행한 과거와의 단절을 비웃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 없다'를 내걸며 노골적인 모방을 행한다. 온전히 창조적인 답 역시 없는 것이다.

토론에 있어 100점짜리 답안은 없다. 10점짜리 답안 10개가 모여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결론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Mr. 찌질. 고전만을 답습하는 근엄한 체면주의를 흉내내기엔 우린 아직 젊은 20대가 아닌가.

민다혜 취재2부장 gggooo555@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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