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주체의 평등 실현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세계

‘청각장애인도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 수 있다면?’ 지난 10월 12~13일에 열린 ‘배려하는 디자인 국제 경진대회(Inclusive Design Challenge in Seoul, 아래 배려하는 디자인)’ 우승팀의 아이디어다. 이 팀은 노래방 기기 화면에 원곡과 이용자의 음정그래프를 보여줘 이용자가 자신의 음정을 정확히 맞춰가며 부를 수 있게 디자인했다.

‘배려하는 디자인 국제 경진대회’ 우승팀의 'PitchPerfect'. 이용자는 그래프를 통해 자신의 음정을 원곡과 비교하며 노래할 수 있다.

배려하는 디자인은 전문 디자이너와 장애인이 한 팀을 이뤄 주어진 주제에 대한 창의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대회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과 일맥상통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성별, 연령, 국적, 장애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제품과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최근에는 공공 교통시설의 손잡이, 일용품, 주택, 도로의 설계 등 넓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내가 쓰기에 편해야 한다

이처럼 보편적인(universal) 디자인이 부각되고 있는 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특정 계층, 성별, 사람을 배제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기본 원리는 누구라도, 쉽게,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디자인은 ‘누구에게나’ 편리하지는 않았다. 이용대상의 기준이 성인 남성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손잡이, 화장실 문걸이, 주차장 한 칸의 면적 등을 주로 젊고 건강한 ‘표준 체격’의 사람이 사용하도록 디자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편협한 ‘표준’ 관념에서 탈피하는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시작이다. 20세기 들어 대량생산으로 인해 대부분의 상품과 공간이 표준화됐다. 하지만 오늘날 다원화 사회에서는 디자인 과정에서 구성원의 개성, 욕구, 취향을 하나하나 존중하기를 원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고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현상도 유니버설 디자인의 확산을 촉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니버설 디자인이 단지 여성이나 어린이,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표는 이들이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게 하는 데서 나아가 신체 건강한 일반인도 보다 나은 사용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나소닉의 드럼형 세탁기는 최초로 드럼입구를 30도 위로 기울여 허리를 많이 굽히지 않고도 뚜껑을 여닫을 수 있게 디자인한 상품이다. 윗면에 뚜껑이 달리면 키가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의 손이 세탁조의 바닥까지 닿지 않고, 정면에 뚜껑이 달리면 허리를 과도하게 굽혀야하는 두 문제점을 동시에 해결한 것이다. 이처럼 유니버설 디자인은 노약자나 여성뿐 아니라 일반인도 보다 편리하게 상품을 사용할 수 있게 돕는다.

하이힐 끼지 않게, 주차 공간 더 넓게

유니버설 디자인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가장 자주 직면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데서 확산된다. 여성은 도시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약자이다. 서울시의 ‘여행(女幸) 프로젝트(아래 여행)’는 도시환경의 주체로서 여성이 행복할 수 있는 도시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특히 ‘여행 시설 가이드라인’을 만족하는 건물과 시설에 인증을 내주는 사업은 도시의 모습을 점차 여성 친화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2009 내가 디자인하는 서울’ 금상 수상작(이연진 작품). 지하철 수유실

2009 내가 디자인하는 서울’ 은상 수상작(이강산 작품). 버스 가방걸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협의 아래 마련된 가이드라인은 보행로, 주차장, 화장실을 대상으로 한다. 매뉴얼에 따르면 보행로는 하이힐이 끼지 않도록 보도블록 틈새 간격을 조정하고, 맨홀을 길 가운데 설치해서는 안 된다. 주차장은 여성이 어린이나 노약자와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 점을 고려해 출입구와 관리실에서 가까운 자리에 여성 전용 공간을 마련한다. 여성 화장실은 변기수를 늘리고 옷걸이와 손잡이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지난 9월에는 매뉴얼의 범위가 공원, 아파트, 기업으로 확대돼 새롭게 발표됐다.

서울특별시 여성정책담당관 여성행복도시팀 한미애씨는 “여행 이후 여성정책에 대한 인지도와 만족도가 2배 이상 올라갔고, 여행 네이버 카페에도 긍정적인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는 일부 남성으로부터 이런 재설계가 오히려 역차별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여행 정책의 혜택이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간과한데서 비롯된 오해다. 도로의 틈새를 조절하면 노약자나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쓸 때도 덜 위험하다. 또 화장실의 옷걸이, 손잡이를 조절하는 작업은 키가 작은 남성에게도 유용하다.

창의성 이전에 배려

세심한 배려가 깃든 디자인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표다. 배려하는 디자인의 우승팀 리더 김시연씨는 “이번 대회를 통해 배려하는(inclusive) 디자인이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도 노약자, 장애인을 따로 분리시키기보다 ‘우리’로 통합하려는 디자인 마인드를 갖춰야 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사회 통합을 이끌어 내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양준영 기자 stellar@yonsei.ac.kr
자료사진 영국문화원, 여행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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