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당기기에 능해야 연애를 잘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 무관심해도, 너무 적극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말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 고 전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서재에 걸어두고 마음에 새겼다는 글귀다. 서경에 등장하는 이 경구는 마음이 위험해져 갈수록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중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학술부 기자로서 가장 고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중용’이다. 거하게 부르자면 ‘중용’이지만 결국 독자와 밀고 당기기를 고민하는 것이다.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칠 경우 학술부 기사는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게 된다. 이 중 한 극단은 바로 독자도 이해 못하고 기자도 이해 못하는 기사다. 주로 학계에서 주최하는 토론회 기사나 철학 기사를 작성할 때 이런 기사들이 나오기 쉽다. 대학 사회의 아카데미즘을 구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어려운 주제들을 선택하다보면 독자에게 외면당하기 쉽고 결국 누구를 위한 아카데미즘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 것은 정체성이 모호한 기사다. 학술부 기사는 ‘너무 어렵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이러한 비판점을 극복하고자 대중적인 소재를 선택해 쉽게 풀어내다보면 전공서적에 한 두 줄 언급되는 내용을 길게 풀어쓴 정도, 혹은 박물관, 전시회 탐방서가 되고 만다.
일반인, 학부생, 전공생 중 어느 집단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기사를 쓸 것인가, 학계의 최신 동향을 다룰 것인가 대중화 된 소재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할 것인가. 본격적인 기사를 쓰기 전,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이야 말로 학술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우리나라 전통 예술 중 ‘줄타기’는 맺고 풀기, 중심잡기가 핵심이 되는 예술이다. 그 중 ‘살판’은 줄타기의 백미로 줄 위에서 뛰어올라 공중회전을 한 다음 다시 줄 위에 앉는 동작인데, 공연에서 가장 어려운 동작으로 꼽힌다. 나는 아직 줄 위에서 한 발짝 떼는 것조차 아슬아슬한 초짜 놀음꾼이다. 그러나 언젠가 멋드러지게 살판을 연출할 그 날을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중심잡기에 힘쓴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