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부기자 백지원

 

어제 또 밤을 샜습니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춘추를 시작한 후로는 매주 아침 채플을 대하듯 묵묵히 밤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전 항상 가장 늦게까지 깨어 미처 못 끝낸 기사에 허덕이는 부류였거든요. 다만 이번 밤샘은 평소와 달리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밤을 새지 않았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밤새 진행되는 총여학생회와 총학생회 개표식에 갔는데, 저 말고도 취재 온 「연세춘추」기자는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종일 취재에 지친데다가 굶은 배가 너무 고팠던 탓인지, 세 보따리나 사온 야식을 먹으며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우리 기자들은 무척 여유롭고 풍요로워 보이더군요. 사람 수가 좀 필요이상으로 많긴 했지만 그것도 넘쳐흐르는 풍요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도 테이블에 앉아 다른 기자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아니, 나누고 싶었습니다.


처음 제가 느꼈던 인상과 다르게 당시 다른 기자들의 심기는 그리 편치 않았던 모양이에요. 마냥 앉아 개표결과를 보고 있자니 그 기분이 이해가 가긴 했습니다. 사실 무척 지루했어요, 이번 선거는. 선본은 달랑 2개, 결과는 처음부터 한 선본의 압도적 우세. 한 단과대 개표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박수와 함성, 그리고 다시 표를 세는 동안의 정적. 이 과정의 반복을 지켜보면서 딱히 할일도 없는 제삼자로 존재하는 것은 여러 가지 착잡한 상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먼저 개표식에 오기 전 어느 기자가 취재하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어요. “기자란 게 사람을 참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소요(騷擾): [명사]
1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남. 또는 그런 술렁거림과 소란.
2 <법률>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이나 협박 또는 파괴 행위를 함으로써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함. 또는 그런 행위.


그때 전 맞는 말이라고 대답했어요. 별다른 주석을 덧달 것도 없이 그 말 자체로 공감이 확 올라오더군요.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별 부질없는 연계성 사이에서 헤매다보니 예전에 본 글 하나가 떠올랐어요. 독일 동화작가이자 신문사 편집장이었던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민감성의 시대’라는 글에는 저널리스트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소요(騷擾)와도 같다는 구절이 나옵니다.(번역문, 그것도 무척 오래된 책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원래 표현은 알 수 없었습니다.) 기자의 역할에 대한 딜레마는 언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소요를 나쁜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너무나 익숙한 세계의 규칙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이 되라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당부를 말한 글이었지요. 하지만 소요라는 표현만큼은 무척 현실감 있게 다가왔어요. 적확한 표현에 페티시적으로 집착하는 제게 이 표현의 부유감은 역설적으로 진실을 잘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예전에 신촌의 재래시장인 다주상가를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 다주상가는 별세계 같았고 별세계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죠. 별세계에 들어온 이방인인 저는 물건을 팔지도 사지도 않으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고 다녔습니다.


“뭐 찾는 것 있어요?”라고 묻는 아주머니를 실망시키는 것이 무서웠어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잽싼 걸음을 걷는 손님을 따라잡아 말을 거는 것도 미안했고요. “연세대학교 학보사 연세춘추 기자 백지원인데요”라며 꺼내는 말머리는 언제나 어눌하게만 들립니다. 다행히 다주상가 상인들 중 몇 분이 취재를 허락했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손님들의 말들은 잘 들어보지 못했고 기사에 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귀찮게 하면서 취재하지만 결국 소용없는 소요에 머물지 않나 하는 회의감도 저를 괴롭힙니다. 학내 언론사 중에서도 「연세춘추」에 들어온 이유 중에는 공식적인 활동에 대한 미묘한 동경도 있었습니다만, 학외 사안을 주로 취재하는 사회부의 기사에서 학내공식신문이라는 「연세춘추」의 위치는 큰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방가르드(avant-garde): [명사]<예술>
1 기성의 예술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전위파.
2 =전위(前衛). 


다시 개표 현장을 돌이켜 봅니다. 개표를 지켜보며 다른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다 제가 이번 기사에서 다루는 ‘아방가르드’ 자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금 나와 있는 선본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며 차라리 기권하자고 말하는 이 자보는 익명으로 게재됐습니다. 다만 이들은 자기들을 구분이 가지 않는 기존 선본들에 대한 대안의 의미로 ‘기호 2번’ 아방가르드라고 칭하고 있긴 해요. 한 기자가 농담인지 “혹시 지원이 너가 아방가르드 아니니?”라고 하더군요. 밤이 깊어 정신이 피폐했던 저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만약에 나라면 아방가르드라고 안 했지”


별 생각 없이 한 대답 때문에 다시 생각해 본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제게 아방가르드란 선본명은 좀 촌스럽게 느껴져요. 제가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이기 때문일까요. 아방가르드란 말에선 의식이 깨인 앞선 자들이 분명히 있고 그들의 선도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은 냄새가 나거든요. 태생적으로 대중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아방가르드는 학생사회의 의견을 수합해야 하는 총학생회와는 성격상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자에게는 아방가르드란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소요(騷擾)의 역할은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것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아방가르드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끔 아방가르드가 되고 싶은 치기가 치밀 때도 있어요. 이런 치기가 잘못 기울어지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일간지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지 않은 소재에 집착하게 되고, 팩트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기사에서 마구 꺼내게 됩니다. 이런 건 모두 경계할 만한 일입니다.

학생(學生): [명사]
1 학예를 배우는 사람.
2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 ≒학도.
3 생전에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의 명정, 신주, 지방 따위에 쓰는 존칭.
4 <역사>신라 때에, 국학에서 가르침을 받던 사람.


「연세춘추」기자의 신분은 학생기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기자 앞에 붙은 학생이란 말이 단지 학생이면서 기자라는 이중적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학생처럼 ‘기자 일을 배우는’ 기자이기 때문에 내가 학생기자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서 무척 부끄러워요. 「연세춘추」에 들어와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누구나 조금씩 하는 것이고, 실제로 「연세춘추」의 지원서에서도 종종 보이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학내 언론입니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언론이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은 원래 결과물을 쏟아내는 작업이지요.


이 글은 본질적으로 잡문이긴 하지만 일단 ‘부기자일기’라는 꼭지에 속해있습니다. 일기면서 일기의 어투가 아닌 것은 이해하세요. 이건 자의식으로 가득 찬 고백이 치닫기 쉬운 ‘싸이어리’화를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사적인 내용임에도 공적인 공간에 올려져 ‘기사’로 취급되는 이 글은 제게 상당한 부담이었어요. 이 부담감의 원인은 일기라는 타이틀 아래 개인적인 척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읽힐 것을 고려하게 되는 싸이월드 다이어리의 모순과도 엇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남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라면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를 건네자고 맘먹었어요. 이런 다짐을 쓰는 내내 잊지 않기 위해, 글에 몰입한 나머지 과잉된 감정에 도취되는 걸 막기 위해, 「연세춘추」기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인 ‘소통’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구어체를 쓰자고 작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어투가 남의 일기를 보는 관음증적 쾌락을 일정부분 감소시켰다면 사과드리지요.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하고픈 말이 너무 많더군요. 글을 쓸수록 생각은 불어나고 불어난 생각은 저들끼리 엉킵니다. 도무지 추스르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일반 기사를 쓸 때에도 줄곧 길어진 분량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인지라 분량을 주체하기가 힘들었어요. 모 선배 말대로 글쓰기에도 선택과 집중은 필요합니다. “부담 갖지 말고 느낀 대로 솔직하게 쓰라”는 말 따위 참고하면 큰일나는 거지요(빠득). 이렇게 범위가 무궁무진한 글은 철저한 계획 하의 연출이 절실합니다. 사실 이제 와선 구어체도 좀 후회스러운 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근지럽습니다.

덧. 문장이란 언제나 입안에서 몇 번이나 되뇌어보다가 우물우물 뱉아내는 것이니 문장 하나를 쓰고 보면 단내가 나면서도 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어라

덧2. 아방가르드의 2번 뜻인 전위(前衛)의 국어사전 풀이 중에는 ‘2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의 선두에 서서 지도하는 집단이나 부대. 레닌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조직 원천이 되었다’란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자보를 그 옆에 있던 자보를 붙인 ‘사회주의학생동맹’이 함께 붙인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 듯 합니다.

 

글 백지원 기자 kaleidoscop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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