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숫자엔 묘한 힘이 있다. 아무리 빈약한 주장이라도 수치가 근거로 제시되면 왠지 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숫자는 추상적인 것에 구체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청년실업은 딱 ‘100만’이다. 99만 명도 아니고, 100만 1명도 아니다. 막연히 존재하는 청년실업이란 사회적 현상은 ‘100만’이라는 숫자로 규정지어졌을 때 좀 더 명쾌해질 수 있다. 이처럼 십진법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0이 들어간 숫자는 횟수를 매긴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만약 십진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결국 어느 특정한 숫자를 잡아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일단 의미가 부여되면 그 차이는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전까지 별 의미없이 느꼈어도 효과는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한번 더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숫자 그 자체가 아니라 숫자를 통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어떤 대상이다. 문화권에 따라 그 숫자는 달라지겠지만 어느 누구도 아무 것에나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백양로를 걷다 떨어지는 은행에 콧잔등을 맞는 것처럼 특이한 일을 겪었어도, 그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넘어 그것이 나에게, 혹은 나와 그 숫자를 공유하는 이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2008년도 5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두 학기가 마무리 되는 이즈음 당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숫자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덧, 다들 눈치채셨으리라. 장황하게 숫자에 대해서 늘어놓은 건 이번에 1600호가 발간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큰 의미까지는 못되더라도 백양로 가다 떨어지는 은행 같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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