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마다 ‘광장’이 있다. 특히 도서관 앞 광장은 학생들의 목소리가 상호 공유될 수 있는 주요 공간이었다. 도서관은 대학의 상징이기에 그 앞에서의 집회는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표성이 보장됐다. 우리대학교 ‘민주광장’ 역시 지난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의해 죽기 직전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린 곳이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민주광장은 적막하다.

시대가 흐르면서 광장은 공원(公園)화 됐다. 큰 공터였던 민주광장은 90년대를 거치며 곳곳에 작은 규모의 서양식 화원이 조성됐고 학습권 침해라는 이유로 집회도 제한 됐다. 여백의 공간인 광장은 ‘비효율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광장의 공원화는 반길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노장 철학의 역설처럼 광장은 그 여백 때문에 존재한다. 공원과 광장은 분명 다른 목적을 갖는다. 공원엔 쉬러 가지만 광장은 공적 주제로 ‘소통’하러 모이는 곳이다. 기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광장이 많을수록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공공성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그 사회는 건강해질 가능성도 커진다. 때문에 ‘광장’의 존재는 중요한 사회적 인프라다.

광장이 사라진 대학에서 학생들은 강의실과 열람실에 각자의 자리를 만들었다. 학생들의 모임은 하나 둘 사라져갔고, 대학이 어때야 한다거나 사회가 어떻다거나 하는 말들도 낯간지러운 말이 됐다. 그러나 불편이 개인이 아닌 공공의 문제라는 의식이 확산될 때 사회는 변할 수 있다. 교육 투쟁도 다르지 않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저런 방식으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역시 ‘저런 방식’의 산물을 누리고 있다.

김한중 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는 2009년 등록금을 물가인상률 이상으로 올릴 것을 예고했다. 사학법에서 규정하는 대학평의회 구성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 여전히 등록금 책정과정이나 총장선출에 학생들이 참여할 권리는 없다. 광장은 공원화 됐지만 광장의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관심과 참여가 있는 그곳이 바로 광장이다.

김문현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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