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안팎으로 혼란스럽다. 근래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일상적 삶의 토대가 언제라도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중국 한 분유회사의 악질적 행위는 먹거리 불안을 뼈 속 깊이 다시 한 번 각인시켰으며,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초래된 외환시장의 패닉상태는 97년 IMF 환란의 악몽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자아낸다.
학교의 울타리 안에 여전히 처해있는 학생인 우리에게 이러한 소식이 들려오는 ‘바깥세상’은 마치 홉스의 자연 상태를 방불케 한다. 개인적 삶의 안전이 언제라도 박탈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자연 상태에 들어가야 할 우리는 그 처절한 현실 앞에 무기력해 지거나 또는 그 전쟁에서 자기를 지켜줄 보호 장구를 찾는데 열중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홉스는 개인들이 불안에 빠져 자기 보존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은 자기보존의 권리에 앞서 시민사회, 즉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 사회계약의 명제는 자기 자신만을 향해있는 우리의 눈을 역사로 돌려 그 계약의 현장을 찾게 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는 바로 개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공동체, 즉 사회의 기원과 마주대하게 된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그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아되어 87년 이후 상당한 수준의 성장을 이루어왔다. 적나라한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에 저항하여 시민사회는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왔던 것이다. 특히 지난여름 촛불집회는 우리 시민사회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자발적 참여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언해주었으며, 정치적 권위가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다고 믿었던 영역에 사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그 시민사회는 여전히 반복되는 한계에 봉착해있다는 사실 역시 극명하게 노정하였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극적인 표출이 권위의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는 이번 촛불집회 참가자들 역시 상처뿐인 영광만을 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형성이 자신의 권위를 갖지 못할 때에, 정치적 권위는 항상 그 사회를 정치로 귀속하려고 한다. 시민사회는 결국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들 간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는 미명아래, 사회는 정치로 환원되고 만다.
그렇지만 이 한계는 시민사회의 과제 역시 명확히 부각시켜준다. 정치적 권위에 귀속되지 않는 사회적 권위를 세우는 일에 시민사회의 과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학생의 잊혀져버린 역할로서 “의식화”가 재발견된다. 학생은 기성 사회 속에 있지만 그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학생은 항상 기성 사회에 대해 타인으로 등장해 그들로 하여금 권위를 자각하게 할 책임을 지닌다. 즉,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할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 책임이 이 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권리를 지닌 학생들에게 주어진 소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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