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권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목요일 1교시 수업 중. 갑자기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선배 한 명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전해준다. 정신이 멍-하고 곧이어 허무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사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또?

더이상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볼 수 없다니…


이상하게 나까지 우울해…. 
그녀의 사망 소식이 온 국민에게 충격을 주던 날, 한 친구가 방명록을 남겼다.

최근 빈번히 일어나는 연예인들의 사망 소식에 이처럼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유명인의 죽음은 이렇듯 커다란 파급 효과를 남기지만, 사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자살과 관련한 현상으로 ‘베르테르 효과’가 있다. 괴테의 소설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시대와의 단절감에 대해 동질감을 느낀 젊은이들의 자살이 급증한 사례가 있었다. 이와 같이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일컬어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따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지난 9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자살을 소재로 <나는 살고 싶었다>편이 방영됐다.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와 사례를 분석한 결과, 그들의 유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살고싶다’는 강한 의지가 표출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정말 살고 싶은데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만 없어지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등의 내용이 적힌 유서들.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故이은주씨의 유서. 가족에 대한 애정과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는 내용이 담겨있다.


죽음에도 '귀천'있나

유명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한 부분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인과관계까지 밝혀내는 반면, 일반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중요히 다루지 않고 혹 기사가 실리더라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생활고를 비관해’ 등의 단순한 문장으로 자살 원인이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일반인의 자살과 같은 경우에 그 원인의 분석 없이 단순 비관사로 단정 짓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의 처지를 한 번도 비관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같은 생활고를 겪더라도 어떤 이는 삶을 포기하고 어떤 이는 지속한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 ‘죽을 용기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사실 실제로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었을 심적, 정신적 고통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가까운 친척의 자살을 경험한 이후로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최아무개(21)씨는 “결국 자살을 감행하는 개인의 내면적 상황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남은 사람의 입장에서 함부로 정죄할 수는 없다고 본다”며“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또한 자유의지에 의한 개인의 선택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살담론 : 신에 대한 모욕 또는 자기 생명을 포기할 정당한 권리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명을 부여받았고, 태어나서 살고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이왕 태어난거 더 멋지고, 가치 있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열심히들 노력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만은 않다. 불행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갑작스런 불청객이 끼어들기도 한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압박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때 그들은 탈출구를 찾게 되고, 수많은 탈출구 중 이 세상을 떠나는 극단적인 방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의 주제로 삼으면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말을 말아야 한다는 게 정치, 종교라고는 하나 자살담론에 있어서는 종교를 빼놓을 수 없다. 생명은 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것인가, 아니면 신이 준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 뚜렷한 시각차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죄악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말 그대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멈추는 것도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임아무개씨는 “세상에 오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듯, 세상을 떠나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람이라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목적과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전에는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종교 뿐 아니라 개인 간에도 자살을 향한 시각 차이는 다양하다. 지난 여름방학 홀로 떠난 인도 여행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는 아주대학교 조아무개(화학 ‧ 07)씨는 “자살은 한 개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행위”라며 “지금까지 달려온 자기 자신을 기만한 죄"고 말했다. 자살이 배부른 행위라는 의견도 있었다.  두 자녀 키우랴, 집안일 하랴, 직장 다니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주부 이아무개(47)씨는 "자살은 더 살고싶은데 못 사는 사람(가령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을 괴롭히는 행위"라며  "자살은 선진국에서 많이 일어난다. 먹고 살만 해지니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고 생각만 깊어지고,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결국 스스로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는 것이다.


자살, 그들의 생에 신화를 덮어씌우다  


유독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생을 져버린 그들의 이름 앞에는 ‘요절한 천재oo’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ooo’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소설 ‘인간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자무는 평생에 걸쳐 5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4번의 실패 끝에 그는 결국 마지막 시도에서 그렇게도 바라던 죽음에 골인했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굴지의 락그룹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도 27세의 나이에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서는 매우 유명하다. ‘서서히 소멸하는 것보다 한 순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는 그의 유서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열정 없이 서서히 소멸해 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미 나에게는 정열이 없다. 기억해 주기 바란다. 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 커트코베인


깨져버리기 쉬운 영혼을 가진 그들에게 세상은 살아가기에 너무 벅찬 곳인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때로는 존재에 앓다가 죽어간 그들의 삶이 ‘자살’이라는 요소로 인해 약간의 신화적 요소를 띄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들의 삶은 더욱 격정적이고 기구하며, 자기만의 비밀을 안고 가버린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삶의 괴로움이 사후 그들의 삶과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서요…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치면 자살예방센터, 심리 상담실 등을 안내하는 화면이 뜬다. 누군가는 죽음을 시행에 옮기기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들에 전화를 걸 것이다. 과연 어떻게 상담이 이루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저녁 7시 30분 경 ‘한국자살예방협회’와 ‘라이프라인자살예방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상쾌한 음악과 함께 흐르는 성우의 음성.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수차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 전화를 해 보았다. 세 번 전화를 걸었는데 세 번 다 통화중이다. 정신의 극한 상황에서 이런 곳에 전화 거는 사람은 정말 마지막에 ‘그래도 살아’라고 붙잡아 줄 단 하나의 목소리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면….

또한 말로만 듣던 자살사이트에 가입 해 보았다.  80명 정도의 회원을 보유한 이곳은 겉보기에는 활발한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 듯 했으나, 게시물들의 내용을 찾아 본 결과 회원들 간에 개인적인 연락을 통해 약물 거래, 자살 여행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살 권하는 사회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악일까” 라고. 자살을 사회적 병폐로 보지 않고 죽음에 있어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 하는 태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인식이 흥미롭다. 이렇듯 자살은 개인의 의지로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오묘함으로 인해 그 정당성과 도덕성에 있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이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분명 문제다. 좀 더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좀 더 살만하게 해주겠다고 웃으며 자살을 권하는 사회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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