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1부 김수현 기자

오늘, 전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세상은 뭐든 세 가지로 구성되죠.


의‧식‧주, 아침‧점심‧저녁, 믿음‧소망‧사랑, 머리‧가슴‧배, 철수‧영희‧바둑이, Talk‧Play‧Love,
그리고 연세춘추의 부기자 김수현은 하이힐‧취재수첩‧장미 한 송이…….
2008년 1학기 현재, 연세춘추의 부기자로 살아가고 있는 저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는 하이힐‧취재수첩‧장미 한 송이입니다. 부기자로 갓 임명받았기 때문에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은 저의 세 부분이지만, 이것들은 일 년 동안 앞으로 제 자신을 이끌어갈 ‘중대한’ 임무를 맡은 세 가지이기도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들어주실래요?

# 6cm, 혹은 9cm의 하이힐 _ 나를 지탱시켜 주는 것.

저는 항상 6cm 혹은 9cm의 하이힐을 즐겨 신습니다. 신발장을 열어보면 운동화는 찾아볼 수조차 없고, 구두만 약 여섯 켤레 정도 됩니다. 때문에 나갈 때마다 굽 높은 신발을 신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절 보는 사람들은 ‘발 아프지 않냐’고, ‘네가 아무리 그렇게 애를 써 봤자 평생 호빗족(키가 작은 사람들을 비유한다고 하더군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고, 비웃음 섞인 우려를 해주곤 합니다. 고마운 일이죠.

하이힐, 그리고 하이힐을 신은 사람. 사실 이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곳에서 나오는 소위 ‘멋 좀 부리는’ 여자들은 하이힐 때문에 다 까져버린 발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지만, 그네들은 또 다시 덕지덕지 상처가 내려앉은 발에 하이힐을 덧씌우죠. 그들과 비슷한 입장에서 서 있는 제가 보기에 (물론 제가 ‘멋 좀 부리는’ 류의 사람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만)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는 큰 이유는 다리가 가늘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어도 뭔가 형언할 수 없는 하이힐만의 ‘아우라’가 풍긴다고 할까요.

하지만 굳이 하이힐을 고집하는 저만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에 대한 긴장을 놓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높은 굽을 신고 아스팔트 위를 또각또각 걸어갈 때는 운동화를 신고 터덜터덜 다닐 때와는 다르게 그 자체로 긴장을 하게 됩니다. 걸을 때마다 언제나 따라붙는 ‘또각또각’이라는 소리의 뭉텅이와, 몇 센티밖에 안 되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하늘과 가까워져 있다는 일말의 기쁨, 그리고 그에 비례하여 다리에 가해지는 둔중한 무게감. 이런 것들은 한데 어우러져 그 자체로 제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고, 그것은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하이힐을 신게 된다는 것이 더 맞는 설명일 것입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우며,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입이 돼야 하는 기자는 더더욱 긴장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이전부터 하이힐만 고집했던 저이지만 앞으로 일 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 고집은 더 확고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위해서, 그리고 지금부터 뵙게 될 여러분들을 위해서죠.

# 취재수첩 _ 취재 1부 부기자 김수현

저는 취재 1부입니다. 연세춘추는 8개 부서로 구성돼 있고, 그 중 취재 1부는 학내의 사안을 보도하는 것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취재 1부 기자들은 각자 학내의 부서를 나눠 맡아(이것을 취재처라고 합니다) 매주 이곳들을 돌면서 신문에 실릴 수 있는 아이템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재처를 돌 때마다 취재 수첩은 필수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취재수첩에 적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특히 취재수첩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더더욱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학내에 갑자기 정전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편집국이 있는 미우관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편집국 내의 불이 꺼져버리고 컴퓨터의 전원도 켜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대강당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마자 관계된 사무실에서 원인을 알아보려 백양관과 본관을 동분서주한 뒤 곧장 대강당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대강당 안은 깜깜했습니다. 저 역시 학생들과 같은 입장의 학생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 조금은 당황스럽고 짜증나는 감정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강당에서 여러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것들을 취재 수첩에 담으면서, 의외로 내가 느끼지 못한 것들을 학생들이 많이 느낀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이 당시 저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한 학생의 멘트는 ‘정전이 돼 일순간 불이 꺼져 당황스러웠지만 단합이 잘 돼 좋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취재 수첩에 이런 것들을 담지 않았다면, 저는 이 순간을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학생들이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취재 수첩이 없어도 이런 부분들을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학생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은 기록뿐이다 라던가요, 여전히 저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역사와 영원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아직 저의 발걸음은 미약할 뿐이지만 취재 수첩이 있다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발칸의 장미 _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이에요.

몇 년 전엔가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결코 아니지만, 그나마 문학 작품은 좋아했기 때문에 우연히 펴 보았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유려한 문장들과 수식들에 놀라고 있던 참에, 제 마음을 휘어잡는 한 작품을 보게 됐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라는 제목의 한 단편 소설이었습니다(물론 이상문학상 작품집인 만큼 단편 소설이었겠지만). 사실 그 소설이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훌륭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제 무지한 눈으로 어떤 작품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제가 가진 지식의 양이 부족해서, 차마 그 작품이 훌륭한지 훌륭하지 않은지 판단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저는 한동안 발칸의 장미 생각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으로 떠나보낸 후 원룸에서 혼자 사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같은 원룸에 사는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 관계를 맺고 그로써 외로움을 달래려 합니다. 하루는 그가 거의 메말라 끝이 거무틱틱하게 변해가는, 신문지로 싼 장미 한 다발을 그녀에게 안기고는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장미는 발칸의 장미라고. 내전으로 얼룩져 하루에도 몇 명씩 목숨을 잃는 그곳이지만, 바로 그 발칸에서 나는 장미이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에게 주는 장미가, 바로 그 발칸에서 자란, 가장 귀중한 장미라고.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처음 사온 선물 치곤 너무 심했어.’ 결국 그 남자는 홀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후에 여자가 그 남자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그가 준 장미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저 ‘떠올렸을’ 뿐이었죠.

그 이후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저는 언제나 장미를 생각합니다. 나는 혹시 그 사람들의 장미를 알게 모르게 거절해버린 건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리고 (순수한 혹은 헛된 바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 자신도 물론이고요. 어차피 사람들은 각각 다른 자아를 가졌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의 고독을 완벽히 감싸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또한 인간이기에 서로서로에게 공감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저이지만, 누군가가 발칸의 장미를 건네고,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가 받는 순간 그들이 안고 있던 외로움의 함량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연세춘추 안에서 제가 쓰는 기사는 비록 일면 차갑게 느껴지는 보도기사일 뿐이지만, 누군가가 그 속에서 이파리를 흔들고 있는 장미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저는 너무나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니...발칸의 장미를 여러분들께 드릴게요, 받아주실거죠?

/김수현 기자 yukiss@yonsei.ac.kr

/사진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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