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권미쿡일기 #1

 

품행이 방정한 능력자에게는 모든 길이 열려있다. 허나 신촌동이 아닌 창천동의 지리를 익히며...어찌 됐건 나는 ‘미쿡’에 계시는 부모님과 2008년이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꼭 그분들 곁에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조건으로 나는 이십대 초반의 자유를 누렸고, 약속의 날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사랑스러운 외동딸은 우수한 성적으로 교환학생에 1순위로 선발돼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학교로 등교해야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무작정 구글을 검색해 부모님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찾았다. 그리고 그 학교 사이트에 접속해 입학신청을 해버렸다.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탈락될 수 있다는 팝업창이 불길했다. 그때가 2학기 중간고사 시간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창한 미래를 꿈꾸며 웹서핑을 하던 때였다. 지원서는 꽤나 정교한 척 했지만 의외로 간단했다. 이수 학점과 평점(신생아 평균체중도 안되는 숫자들을 보면 가슴은 아프지만) 등을 입력하라는 소리다. 이후 은행 냄새가 캠퍼스에 진동하던 가을날, 그 쪽 학교로부터 성적표와 재학증명서, 재정증명서 등을 우편으로 보내라는 서면 통지를 받았다. 국제우편이라.. 서서히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론대로라면 이제 한달 안에 입학허가 여부를 알게 되고, 곧 입학허가서를 받게 될 터였다. 그리고는 학생비자를 발급받고, 기말고사가 끝나는 대로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딸이 제 시간에 귀가했나, 라기 보다 추운데 잘 지내고 있나하는 걱정에 전화하신 부모님은 서류 진행상황을 물으시며 바쁘면 유학원에 맡기라는 충고를 여러 번 전하셨다. 그때 권영이 하는 일이 이상하게 잘 풀린다는 것을 한번 쯤 의심해봐야 했다. 역시나, 12월이 됐는데도 여전히 내 서류는 ‘처리 중’ 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을 매일 새벽 세시에 미국에 전화를 걸며 보냈다(읭?). 그쪽 학교 직원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받은 상담전화가 말도 어눌한 외국인이라면 기분 나쁠거라는 생각에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

 

 하루 이틀 여행가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내 신변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나는 신변정리는커녕 어수선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정신없이 보내고 결국 극도의 침체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점찍어둔 물건을 사러 면세점에 갈 겨를조차 없었다. 내가 안내 사항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은 탓인지, International students가 필수적으로 치러야 입학이 가능하다는 시험 공지를 놓쳤다. 예정했던 출국날짜보다 3일을 앞당겨야 가까스로 마지막 시험을 볼 수 있었고, 출국 전날 밤엔 목장갑을 끼고 이를 갈며 짐을 싸야했다. ‘나 사실 미국가.’ 라는 여운의 대사를 남기며 떠나고 싶었는데 나는 누가 나 아니랄까봐 그렇게 본의 아니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나는 다음날부터 학교에 등록하고 수강신청(Register)을 하느라 근 열흘을 고생했다. 일단 첫째 날 반나절은 주차권($144)를 사려고 줄 서다 보니 지나갔고 그 다음 날은 내 담당 상담 선생님을 만나려 3시간을 줄서서 기다려 15분 상담하고 집에 오는, 이런 식이었다. 학기가 이미 시작한 뒤였다고 하면 좀 더 재미있어지려나. 이 사람들도 은근히 ‘만만디’의 피가 흐르는지 하루 종일 나를 이곳저곳 오고가게 했다. 결국 나는 ‘Admissions and records' 직원의 책상을 면전에서 난타하며 항의하는 난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열흘 동안 시달렸으니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상황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일전에 MT에서 만취해 밤새도록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는 전설을 가진 전통한국인은 한마디로 뚜껑이 열린 채 일장연설을 함으로써 일정한 흥분상태에서 외국어능력이 일시적으로 향상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사실 이야기가 좀 ‘없어’보여도 이런 방식으로 외국 대학에 등록해 일정학기 다니는 것을 자비유학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이 이 학교의 경우 나와 같은 외국인 학생은 매 학기 의무적으로 12학점 이상을 수강해야 하고, 수업료는 기본 $1000에 한 학점 당 $30, 보험료, 기타 비용까지 지불해야 한다. 반면, Resident 학생이 비슷한 학점을 수강할 경우 $2000 이내의 수업료를 내게 된다. 자비유학 서류를 우리 대학교에 제출하면 수학 기간 동안 수강한 학점을 일부 인정받을 수 있다. 외국 학교 입학허가서와 지도교수 추천서, 학업계획서, 성적표 등을 잘 정리해 출국 2개월여 전에 제출한 뒤 다녀와서 수강한 성적표를 제출하면 일정 심사를 통해 학점 인정 범위를 결정한다고 한다.

 이제 나는 무사히 등록을 마치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착하게 잘 다니고 있다. 어디서도 입학신청부터 마지막 수강신청까지 속 시원하게 듣지 못해 별것 아닌데도 멀리 돌아왔다. 사람 사는 곳이, 또 대학생활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랴. 이제부터 열두 번에 걸쳐 그저 좀 많이 먹는 자들의 이야기나 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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