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책을 보다 어머니께 걸리면 어머니는...
중학교 시절, 등하교 길에 있던 만화 대여점은 나의 은밀한 기쁨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만화책을 빌려 책가방에 쑤셔넣고는 집까지 읽으며 걸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물론 나는 만화책을 대여점에서 빌리는 일은 불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얄팍한 내 주머니 사정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격주로 나오는 W지가 고작이었다. 나머지 만화에 대한 욕심은 어쩔 수 없이 대여점에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은 사실 우리 집 안에 있었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어머니도 자식들이 만화책을 빌리기 위해 만화방을 찾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가지고 계셨다. 혹여라도 만화책을 읽는 모습이 발견되는 날이면 엄마는 요즘도 악몽을 꿀 때 가끔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혼내시곤 했다. 이번 내 인생의 만화에서는 각종 공포(?)와 싸워가며 만화방을 풀방구리마냥 드나들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 원동력이 됐던 작품을 한 점 소개하고자 한다.

순정만화를 즐기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가수 비와 송혜교가 나오는 ‘풀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유명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풀하우스’ 팬들을 실망감으로 경악하게 했던 드라마지만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기는 하다. 2004년에 방영된 이 드라마가 1993년에 출간된, 즉 10년이 넘은 만화에서 설정을 따 왔다는 것과 어느 정도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 정지훈이 아무리 멋있어도, 이 드라마...난 반댈세!
정지훈씨와 송혜교씨의 팬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드라마는 피치못할 이유로 동거하게 된 남녀의 이야기라는, 10년이 지나도 흥미로운 원작의 설정 덕택에 그나마 빛을 봤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정지훈씨가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송혜교씨가 아무리 예쁘게 나와도 원작이 가지고 있었던 흡입력이 아니었더라면 꽤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몇 회 동안 계속 봐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원작이자 관록있는 순정만화가 원수연씨의 1993년 작품인 ‘풀하우스’는 갑작스럽게 같이 살게 된 한 쌍의 남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영국 시골 구석,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 ‘풀하우스’에 조용히 살고 있던 여주인공 엘리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내쫓긴다. 새주인이 영국의 유명한 인기 배우 라이더라는 놀라운 소식은 둘째치고 집을 어떻게 뺐겼는지조차 모르는 엘리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마침 스캔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던 라이더는 엘리에게 계약 결혼을 제시하고, 둘은 풀하우스에 같이 살게 된다. 엘리와 라이더 두 명 모두 사정없이 고집불통에 자존심만 강해 서로 아웅다웅하다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결혼 하기 전에도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사건이 생긴다. 그리고 원수연 작가는 그 모든 사건과 사고 사이와 끝에서 둘의 사랑이 깊어져가는 과정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 당시 모든 소녀들의 로맨스의 꿈 '풀하우스'
‘풀하우스’는 툭하면 “널 믿었는데…”하는 대사와 함께 가난뱅이 여주인공이 눈물을 뿌리고 부잣집 외동 아드님 남주인공의 뺨을 때리고 도망가다 잡히는 뻔한 순정만화가 아니다. 뻔한 순정만화에 14살 때 이후로 완벽하게 질려버린 필자의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풀하우스’는 그걸 떠나 너무 사랑스럽고 매력이 넘친다. 순정만화가 본질적으로 가지는 과도하게 드라마틱한 속성 때문에 말도 안되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기는 한다.

신데렐라와 백마 몇 마리쯤 소유하신 왕자님의 기본 구조는 엄연히 그대로다. 그러나 현실성 없는 동화 이야기 보다는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이야기다. ‘풀하우스’에는 가난해도 고집 불통 여주인공 엘리와 부자라도 평범하고픈 남주인공 라이더가 있다. 또 아무리 번다한 사건사고를 그려도 그만큼이나 알콩달콩한 일상 속의 사랑도 그려서 독자의 마음을 데웠다 끓였다 식히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책을 뒤적여보면 1권과 마지막 16권의 그림체가 바뀐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바뀌는 만큼 발전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풀하우스’가 변화하는 방향은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다. 아무리봐도 처음보다 점점 성의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개인의 느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느끼기에 점점 단순화돼가는 캐릭터의 얼굴과 회를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개그컷들은 장기간의 연재에 작가가 지쳐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열혈 독자로써는 살짝 배신감이 들 정도다. 흘러갈수록 재미를 더해가는 전체적인 줄거리와 대비되는 그림체의 변화가 사뭇 슬프다.

하지만 끝무렵의 약간 아쉬운 그림체만 빼고 보면 ‘풀하우스’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순정만화계의 명작이다. 탄탄한 구성과 남다른 캐릭터성으로 전국의 소녀들을 사로잡으며 드라마까지 만들어지는 기염을 토했던 ‘풀하우스’다. 이 만화야말로 5~6년전 죄책감과 함께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읽던 소녀팬들이 차기작을 전권 구매할 준비를 갖추고 원수연씨를 기다리는 이유다.

Tip, Tip, Tip! 풀하우스의 뒷얘기를 수년간 머리 속에서 상상해왔던 분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바로 풀하우스 2부가 나왔다는 것. 책으로도 나와있다. 책을 사러 서점을 가는 것이 번거롭다면 네O버에서 만화보기를 유료로 서비스하고 있다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런 분들에게 권한다 : 여자친구가 학창시절 왜 그렇게 순정만화를 좋아했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신 남자분들, 연애 초기 가득했던 엔도르핀이나 감성에 젖었던 지난 날이 그리우신 분들, 뻔질뻔질 맨날 똑같은 순정만화에 질리신 분들

내 맘대로 별점: ★★★★(4/5점 만점) – 망가져가는 그림체가 너무나도 아쉽다

이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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