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OST] 시나위의 <새가 되어 가리>

한 대학생이 신촌 교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튿날,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1987년 6월 10일의 일이다. 이날은 그 달 29일까지 진행되는 국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 항쟁으로 생겨난 헌법은 6공화국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 1987년 6월 10일 발매된 시나위의 2집
  “저 멀리 날아가는 새야/ 들판을 날아 어디로 가는지/ (중략)/ 영원토록 외쳐/ 외로이 한 없이/ 날아가는 새야/ 너 새가 되어가리/ 너 새가 되어가리.” 얼핏 시위현장에서 젊은이들이 불러도 어울렸을 법한 이 노래의 생일 역시 1987년 6월 10일이다.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다. 본곡이 수록된 음반은 <Down & Up>으로 시나위의 2집인데, 시나위는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재야는 물론 거리의 시위 인파와 별 연관을 가지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우회하였듯 전두환 정권도 1980년 광주의 피륙을 난자한 뒤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기획한다. 자로 치마 길이를 재고 가위로 장발을 자르는 대신, 청년들에게 신나게 놀며 정치적 억압은 잊으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 첫 작품은 <국풍 81>이었다. 신군부 핵심인 허문도까지 제 대학 후배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당국은 대학생들의 광범위한 참가를 유도하는 데 분주하였고, 실제로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국풍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끝나고 말았으며, 당일 가요제에 출전한 이들이 대학사회에서 받았을 따가운 눈총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새가 되어 가리>도 6월 10일에 태어났건만...

  서울대에서 사건이 터졌다.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가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난 학생들이 학생회관 라운지의 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청중은 별안간 애국가를 요구했다(반정부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 열심히 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를 들고 다녔던 것도 그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징이었다). 기타 연주자가 급한 대로 떠듬떠듬 애국가를 연주하자 학생들은 무대를 부수어 버렸다. 이어 대운동장에서 열린 ‘옥슨(81)’의 콘서트에도 학생들은 각목까지 들고 나타나 공연을 무산시켰다. 밴드들의 수모는 이어진다. ‘옥슨(82)’ 역시 공연 도중 학생들의 막걸리 세례를 받았고, 유명 그룹 ‘산울림’도 대학축제 중 앰프의 플러그가 뽑혀지는 봉변을 당했었다. 1980년대, 록 밴드와 학생운동권의 관계는 불화 그 자체였다. 

   학생운동권이 록음악을 경멸한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그것이 향락적 서구음악이자 제국주의의 피조물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의 주역이 노동계급이었음을 알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그 무렵 대학가의 ‘대세’는 풍물패나 탈춤반이었고 대중음악에서도 1970년대 이후 포크에 경도되어 있었다. ‘록밴드’는 그다지 대학친화적이지 않았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무한궤도’의 신해철은 서울대, 서강대 재학 중인 멤버로 채워진 밴드를 유별나게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0년대 중반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유행이 옮겨가면서 대학가와 밴드 사이의 괴리는 더 커진 감이 있다. ‘마그마’, ‘무당’, ‘이수만과 365일’에서 언뜻 보였던 헤비메틀은 국내 음반사상 최초로 시나위의 1집에서 만개했다. 그리고 ‘백두산’, ‘부활’, ‘H2O' 등 메틀 밴드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캠퍼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당연히 저항적 학생운동과도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갔다.  



▲한강변에서 열린 축제에 나타난 시나위. 김종서(보컬), 신대철(기타), 강기영(베이스, 현 DJ달파란), 김민기(드럼)의 모습이 보인다.

  정작 메틀 밴드들을 반긴 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해적판 외국 음반에 익숙하던 그들은 시나위 1집에서 “한국인도 메틀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신대철의 기타와 임재범의 보컬에 열광했다. <새가 되어가리>가 들어간 2집의 반응은 더 좋았다. 고교생용 잡지 <하이틴>에서 발표한 인기가요순위에서 <새가 되어 가리>가 1위를 차지했고, 같은 음반에 실린 <빈 하늘>, <해 저문 길에서>, <들리는 노래>, <시나위>, <마음의 춤>이 2위에서 6위까지도 석권해 버린 것이다. 

  시나위가 대학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90년대 초입 국내 메틀밴드는 하나둘씩 해산을 결정했고, 시나위도 1991년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0년대 다시 록은 강산에, 넥스트, 크라잉 넛의 출현과 함께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더 이상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난이 없었다. 도리어 록에 호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록은 비판과 저항의 음악으로 격상되었다. 학생회 선거에 나온 어떤 운동정파는 “서태지, 넥스트와의 제휴”까지 거론했다.     

항쟁 기념식에서 그 노래를 듣고 싶다

  1995년, 메틀이 아닌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기초하여 사회적인 가사를 들고 돌아온 시나위도 환영의 대상이었다. 대학가에 초대되는 어엿한 단골 뮤지션이 되었고, 1997년에는 연세대사태 직후 위기에 처해 있던 한총련의 출범식에도 초대된다. NL(민족해방계열)이 주도하던 한총련과 ‘한국 메틀의 원조’ 시나위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정치적인 동맹도 아니었고, 문화적 취향에 이끌린 교감도 아니었다. 그저 젊음과 젊음의 뒤늦은 만남이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더디나마 엎어지지 않고 진전되었다. 반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발육부진에 가까웠다. 나는 그에 보태어 정치적인 올바름과 문화적인 생동감, 세련됨이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 것도 ‘1987년 체제’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께 ‘인디(독립) 음반’이 80년대 금서를 조달하던 사회과학서점에서 유통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향후 대학가의 문화지형은 단순화되고, 대학생들은 탈정치화되었다. 록을 제국주의라고 손가락질하던 학생운동권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경직성을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오늘날 소멸의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 그럼 록은? 홍대앞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빨려드는 분위기다.     

 1987년 6월 우연히 함께 나온 해방의 운동과 자유의 노래는, 당시에는 조우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되고, 예술은 길다. 올해 6월 항쟁 기념행사에서 시나위의 <새가 되어 가리>가 연주되는 풍경을 상상한다. 새가 되어 날아갔을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각하면서. 

 

시나위를 거쳐간 뮤지션들

시나위 1집의 보컬은 임재범이었지만, 가입 시점은 김종서가 더 빠르다. 김종서는 중저음에 약점을 보이는가 하면, 잠적했다 나타나 공연을 망친 후 시나위에서 탈퇴하였다(부활에 들어갔으나 다시 쫓겨나는데 그 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이승철이다).  그후 리더 겸 기타리스트 신대철을 찾아온 사나이가 임재범이다. 신대철은 그가 알고 보니 고교 동창이었으며, 엄청나게 말을 재밌게 했다며 첫 만남을 기억한다. 신대철이 아버지 신중현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기타를 손에 잡았고 고등학교 때 시나위를 결성한 데 비해, 임재범은 청소년기 내내 혼자서 연습했으며 시나위에서 첫 밴드생활을 했다고 한다. 임재범은 외인부대, 아시아나를 거쳐 소울과 록을 오가는 솔로이스트가 되었다. 절치부심하여 시나위에 재가입, 2집과 4집에서 목소리를 선사한 김종서 역시 솔로로 독립하여 가장 대중적인 록커가 된다.

 시나위의 라인업은 1집보다 2집에서 더 화려하다. 최근 DJ달파란으로 활동하는 강기영이 베이스를 잡았고, 훗날 카리스마(김종서가 시나위 2집과 시나위 4집 사이에 있었던 밴드), H2O, 김종서밴드 등을 거치는 김민기(물론,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니다)가 드러머였다. 3집에서 베이스를 맡은 김영진도 카리스마, 김종서밴드, H2O를 차례로 경유한다. 4집에서 베이스를 친 고교 중퇴생 서태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자는 칼 같은데 필(feel)은 별로라고 해서 ‘칼박똥필’이라는 불미스러운 별명을 가졌다는 일화가 재미있다.

 재결성과 함께 나온 5집에서 보컬을 맡은 손성훈은 출반 일주일만에 탈퇴한 다음 <천년의 사랑>, <고백> 등을 히트시켰다. 시나위 이전에 넥스트의 김세황과 함께 ‘다운타운’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정한종은 시나위 6, 7집에서 절창을 선보인 김바다와 ‘나비효과’를 만들었다. 8집까지 시나위의 드러머였던 신동현은 야구선수 출신 이상훈과 ‘what!'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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