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그 남자네 집』中

첫사랑은 어설프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또 첫사랑은 설렌다. 보기도 부끄러워 서랍 한 켠에 고이간직해 놓은 연애편지처럼. 『그 남자네 집』을 쓰는 내내 집착에 가까운 애정으로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말한 작가 박완서. 그녀가 그리는 첫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처음 만났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그 남자가 돈암동으로 이사오면서부터다. 소설은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 여자가 우연히 돈암동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바로 그 곳이 그 여자가 처녀적 살았던 동네로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간직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곳을 시작점으로 나는 그 여자가 간직한 첫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로 했다. 성신여대역에 내려 돈암동에 있는 그 남자네 집을 찾아나섰다. 그 때부터 서울의 돈암동이라는 평범한 동네가 드라마 세트장처럼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예상을 뒤엎고,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서 홀로 초연히 그 남자네 집은 그냥 조선 기와집으로 남아 있었다. 대문이 한길로 면한 그 길가의 다른 집들이 다 사오 층 높이의 빌딩으로 변해버려서 그런지, 한 걸음 물러나 있음으로 더욱 당당해 보이던 집이 푹 꺼져 보였다.
- 『그 남자네 집』중에서

돈암동을 몇 바퀴나 돌았다. 저 어디선가 그 남자네 집이 초연하게 남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지만 그 여자의 예상이 빗나간 것처럼 내 예상도 빗나간 채 그 남자네 집은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 묘사대로라면 동네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모두 알만큼 그 남자네 집은 눈에 쉽게 띄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집은 없었다. 긴 세월의 흐름에 변해버렸을까, 혼자만의 사랑으로 간직하고픈 작가의 장난일까, 그것도 아니면 공사장의 뿌연 먼지 뒤켠으로 숨어버린 것일까. 과연 알 수가 없다. 허구와 자전적인 사실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드는 통에 약간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대신 비슷하게 생긴 조선 기왓장이 놓여져 있는 집들을 여럿 바라보며 ‘아마 이 곳에 그 남자가 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돈암동의 기와집은 모두 그 남자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 집의 사랑채 안에서 그 여자와 그 남자가 함께 듣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전시의 극장은 난방이 안됐다. 그는 내 옆에 꿇어앉아 자기 털장갑을 뒤집어서 내 발끝에 씌워주곤 했다. 손가락장갑을 바닥만 뒤집으면 그 안에 다섯 손가락이 뭉쳐 있게 되고 그걸 발끝에다 신으면 아무리 꽁꽁 언 발가락도 스르르 녹으면서 훈훈해진다. (중략) 언 발가락이 따뜻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당하고 있다는 만족감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까.

명동이 이렇게 특별한 장소인 적이 있었을까. 그 남자와 그 여자의 가장 따뜻한 추억이 담긴 명동은 몰라보게 변했다. 전시에서도 환히 빛나던 동네는 몇 번의 전성기를 맞았다가 이제는 조금 주춤해진 기색이었다. ‘중앙극장’은 ‘중앙시네마’라는 멋스러운 신식 이름으로 바꿔달았고 그 앞에 세워진 버스 정류장은 온갖 곳에서 실어나른 승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50년 전 명동 중앙극장 주변의 황량한 불빛은 이제 각종 네온사인 때문에 풍성한 불빛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사랑과 현실은 다른 궤도를 그렸던 것일까. 그 여자는 그 남자를 뒤로한 채 미군부대에서 알게된 은행원과 결혼하게 된다. 그렇게 첫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 남지 못하고 기억 한 켠에 위치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남자의 누나가 찾아오면서 그 남자와의 못다한 연애는 다시 한 번 시작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채소시장 네거리 한가운데 둥글게 둘러앉아 시루떡, 인절미, 양념장을 찍 끼얹은 돼지껍데기나 우무, 순대, 잡채 따위, 당장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파는 데서 군것질을 하는 것도 그는 좋아했다. 지나다니면서 보면 먹음직스럽기보다는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이런 음식들을 그 남자하고 같이 군것질하는 맛은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그 남자와 함께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그 여자는 당시 유행했던 ‘자유부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지금의 동대문 시장은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세월의 흐름을 조금 비껴가고 있었다. 시장 한가운데 있는 돼지껍데기나 순대 등의 음식은 여전히 김을 모락모락 낸 채 손님들을 맞이했고 질척질척한 바닥도 그대로였다.
(「자유부인」 : 오선영이라는 대학교수 부인이 젊은 대학생하고 춤바람이 나는 얘기로 50년대 당시 큰 인기를 끈 신문의 연재소설)

그 남자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청량리 역사 안은 온기 없이 썰렁하고 광장 주변은 남루하고 시끌시끌했다. (중략) 그 남자는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한 청량리역을 찾았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이곳은 이별의 장소다. 이처럼 하나의 장소는 개인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마치 평범한 돈암동의 한 기와집이 첫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향수가 되어 준 것처럼.
그야말로 풋풋한 첫사랑에 어울리는 어설픈 이별이었다. 얼마 후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실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벌레가 뇌로 들어가 수술을 하던 중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 벌레의 짓이었을까. 내 젊음을 황홀하게 빛낸 그 기쁨의 시간이 다 벌레의 선물이었을까.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

벌레들의 장난인듯, 축복인듯 순수했던 첫사랑. 그 후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과거의 기억으로 남겨둔 채 한 여자의 남편과 한 남자의 아내로 몇 십년을 살았다. 어느날 신문에서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그 여자는 그 남자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한다. 그 남자 어머니 장례식에서의.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첫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욱 완전한 기억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포옹은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 남자와의 마지막 포옹은 몇 십년동안 간직한 첫사랑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그 때, 혼란해서 더욱 간절했던 첫사랑은 그렇게 남겨졌다. 그 남자가 구슬같은 여자라고 칭했던 그 여자는 50년이 지나 할머니가 되었고, 함께 사랑을 나누던 장소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찻집이며 벤치는 길가에 널려있는 그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속에 특별한 ‘그것’으로 남겨졌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기억이 된 첫사랑 이야기, 『그 남자네 집』.

/글 조규영 기자 summit_k@
/사진 김지영 기자 euph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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