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 만원으로 떠나는 박물관 문화유적 답사기

▲ /사진 김영아 기자 imstaring@ 지난 10월 27일 ‘연세대학교 박물관 문화유적 답사(아래 문화유적 답사)’ 작전이 개시됐다. 아침 8시 30분에 우리대학교 독수리상 앞에서는 한 대의 버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가족끼리, 혹은 지인들을 동행한 교직원들이 대부분이었던 그 무리는 바로 문화유적 답사 작전의 구성원들이었다. 버스에 탑승하자 목적지인 충주까지의 인솔을 담당하는 박물관 학예연구실 채세병 과장대우의 굵직한 소개가 이어졌다. 서너 시간 걸리기 때문에 눈을 붙여도 좋다는 인솔자의 말을 듣자마자 모두들 조용히 잠을 청하거나 창밖을 바라보고, 혹은 각종 휴대기기에 빠져 각자만의 여행기를 써내려갔다. 석불귀와 미륵리석불입상 작전의 첫 번째 수행지인 중원미륵리사지는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와는 다른 곳으로, 신라말에서 고려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는 사라진 지금 중원미륵리사지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불귀와 미륵리석불입상이다. 석불귀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이 석물로 본래는 비석을 받치는 받침돌이다. 거북이 형상이기에 거북이 귀(龜)를 써 귀부(龜趺)라 부르기도 하는 이 거북이 형상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용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 귀부가 거의 제작되지 않아 신라·고려시대만의 독특한 조각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등껍질 하나하나 자세히 조각되진 않았지만 한 발을 내딛고 있는 거북이상의 모습이 인상깊다. 거북이와 정면을 마주했을 때 오른쪽 등껍질을 향해 돌면, 두 마리의 작은 거북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상님들의 소박한 숨은그림 찾기였을까 아니면 어떤 또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미륵리석불입상은 부처님 얼굴에 이끼가 끼거나 화상을 입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돌이 화상을 입었다’는 것은 돌이 쩍쩍 갈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미륵리석불입상을 둘러싼 벽면은 세월의 흔적이 쌓여 금이 가 있거나 이끼가 잔뜩 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만 부처님 얼굴만은 깨끗하다. 비가 올 때 분명 물기가 부처님 얼굴에 닿는데도 불구하고 온전히 미소를 품고 계신 부처님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귓가에 울리는 불경소리가 마음을 따스히 녹이고 있었고 멀리 험준함을 당당히 자랑하는 월악산이 그 위엄을 단풍으로 멋들어지게 수놓고 있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탄금대(彈琴臺)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라 불린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 음악은 귀족만이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할 때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연주를 감상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전투에 임한 곳이다. 그러나 결국 패전하고 장군은 절벽에 뛰어내린, 장군과 군졸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탄금대토성이 발견돼 국사교과서에서나 보던, 흰색 줄들이 이곳저곳 유물과 유적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고 인부들은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탄금대 앞으로 남한강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그 사이를 수상스키를 즐기는 한 사람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거진 산 바로 뒤 역시 단풍을 옆에 낀 채 남한강은 신립 장군의 혼이 깃들었음을 의식했는지 조용히 갈 길을 가고 있었다. ▲ 우리나라의 중앙, 중앙탑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사람들 /사진 김영아 기자 imstaring@

고구려의 기상, 신라의 힘

그 다음 작전지는 중원고구려비. 이 곳은 생각보다 왜소했다. 남북 통틀어 유일한 고구려비지만 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낙들의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한다. 때문에 상당히 많이 닳아 없어져 비의 앞면과 옆면 부분 정도만 읽을 수 있다. 이 비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고구려가 백제 수도인 한성을 장악하고 충주 지역까지 남하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원고구려비 주위는 상당히 황량했다. 한반도를 넘어 중국, 러시아까지 위협했던 용맹한 고구려가 결국 망하고 말았던 것 같은 쓸쓸함이 비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잠시 고구려의 기상을 맛본 뒤 중앙탑을 보러 발걸음을 돌렸다. 중앙탑의 정식 명칭은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졌다. 국보 제6호로 그 크기는 웅장했다. 통일신라의 국력을 드러내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마음이 서린 것 같다. 석불귀가 부피로써 ‘큼’을 자랑했다면 중앙탑은 높이로써 ‘큼’을 자랑한 것이 인상깊다.

돌아오는 길은 노곤했다. 그러나 단돈 만원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어 뿌듯했다. 만원으로 갈 수 있었던 충주.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단풍의 화려한 수놓음도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지만 무엇보다도살아 숨쉬는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어디서도 쉽게 얻지 못 할 경험일 것이다.

 /글 최지웅 기자 cacwoong@yonsei.ac.kr
/사진 김영아 기자 imstaring@yonsei.ac.kr

박물관 문화유적 답사란?
‘박물관 문화유적답사’는 우리대학교 재학생 및 교직원을 대상으로 지난 2006년 3월부터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학기 중에는 거의 매달 이뤄지며, 답사비는 1인당 1만원이다. 박물관 학예연구실 채세병 과장대우는 “회의를 거쳐 사전 답사 후 답사장소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며 “좋은 프로그램인만큼 교직원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02)2123-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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