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한 조각의 여유

▲ '타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림 손혜령

흔히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투수는 타자의 특성과 약점을 파악해 공략하고, 타자는 투수가 던질 만한 공을 예측해 방망이를 휘두른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야구에서는 투수와 타자 뿐만 아니라 포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수가 타자의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수가 타자의 특성을 연구해 투수에게 알려준다. 어쩌면 야구는 타자와 포수의 전략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포수가 타자를 완벽히 분석해도, 투수가 그에 따라 정확하게 공을 잘 던져도, 타자의 방망이를 막을 수는 없다. 바로 레비나스의 ‘타자성’이란 개념 때문이다. 물론 그 타자(他者)가 그 타자(打者)는 아니지만 말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시간이란 개념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존재와 존재자, 나아가 고독과 시간을 탐구한다.
‘나는 타자를 만진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행위에는 타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존재’는 그렇지 않다. ‘나는 타자를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인 것이다. 즉 ‘존재’는 자동사다. 존재라는 개념에 있어서 타자는 필요치 않다. 그래서 주체가 ‘존재’하게 되면, 주체는 곧 고독한 상태가 된다. 타자가 필요없는 ‘존재’와 함께하는 고독은 복수성을 거부한다. 따라서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선 고독이 필요하다. 레비나스는 고독은 남성적 힘이며, 오만, 주권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 고독은 언제 깨지는가? 바로 고통을 만날 때 주체는 완벽한 고독의 상태에서 조금 벗어난다. 고통은 순전히 주체에게 강요되는 수동성의 의미이다. 죽음은 고통이 극한에 다다른 것이며 죽음 앞에서 존재는 완벽히 수동적이다. 우리가 죽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죽음을 통제할 수 있는가? 인식할 수 있는가? 오직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죽음은 주체에 의해 환원될 수 없다. 죽음은 존재에 있어서 완벽히 ‘타자’인 것이다.
또,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주체는 존재함으로써 현재를 누린다. 하지만 그 현재는 과거나 미래로 흐르지 않는다. 현재에서 기억하는 것이 과거를 뜻할 수는 있지만 과거 자체는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죽음은 주체가 다가갈 수 없는 미래이다. 그렇기에 미래 또한 죽음과 같이 타자적이다. 손에 쥘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그것. 그것이 죽음, 미래, 그리고 타자이다.  여기서 하나 떠올려보자. 주체는 죽음을 맞는다. 주체는 유한하다. 이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체는 여성성과의 에로스를 통해 출산을 한다. 이렇듯 출산을 통해 아이를 낳은 아버지, 즉 주체는 죽음으로 시간을 끝맺지 않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시간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앞서 레비나스가 고독을 남성적 힘이라고 지칭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타자성은 곧 여성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성은 고독이란 개념과는 완벽히 분리돼있고 영향받지 않으며 전적으로 나와 다른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성이란 이성 혹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 대상만의 성질을 뜻한다. 투수가 타자를 백퍼센트 삼진 아웃시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타자(打者)의 타자성(他者性)때문이다. 투수는 투수 자신의 관점으로 타자(打者)를 백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1573호 <철학 한 조각의 여유>에서 소개됐던 미셀 푸코는 타자성을 콕 집어낸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광기는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고 이성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판단될 뿐이다. 레비나스식으로 표현하면, 이성이 광기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성이 타자성이란 개념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미셀 푸코는 무시된 광기의 타자성을 수많은 자료의 함축으로 『광기의 역사』에서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기즈키를 매개로 만난다. 기즈키로 엮여진 이들은 기즈키가 죽고난 뒤에 사랑을 싹틔운다. 그러나, 나오코는 자신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고 결국 나오코는 자살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낫길 바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다. 도울 수 없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알 수 없는, 의사들도 치료할 수 없는 어떤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끝이 회색빛 죽음이라 하더라도, 이해받을 수 없는 ‘타자성’ 그것은 의미 그 자체로 남는다. 외로운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만남으로써 고독에서 벗어나 타자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지웅 기자 cacawoo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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