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를 호령한 고선지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중앙아시아 원정로를 따라 떠난 실크로드 답사는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고선지 루트의 총체적인 답사로 고구려 유민이 끌려갔던 그 길을 추적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번 답사는 각 지역에서 고선지와의 연관성을 찾아 고선지 루트에서의 실제적 체험과 역사적인 확인에 초점을 맞췄다. 신장성 우루무치에서 시작하여 청나라의 성지였던 카슈가르를 거처 또르가르트 패스를 지나 키르기스스탄국경을 넘었다. 나른을 거쳐 이식쿨 호를 지나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쉬켁, 되 아슈 패스와 우드멕 패스를 넘어 탈라스평원, 카자흐스탄의 따라스시, 우즈벡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를 지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길은 고선지가 중앙아시아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넘었던 길이다. 특히 고개나 초원은 지금도 천3백년 전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차가 달릴 수 있도록 넓어진 것이다. 길 양편에는 유목민의 전통적 이동식 가옥인 유르땅이 간혹 보였고, 유르땅 주변에 말, 소, 양, 야크가 방목되고 있다. 동서양의 상인들이 오갔던 대상로인 이 곳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거닐었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현장도 『대당서역기』에서 그 크기의 거대함에 대해 말했던 이식쿨 호수를 직접 보니 그 광대함에 놀란다. 호수 주변이 무려 7백여 킬로미터에 달했기 때문이다. 호수 옆에 있는 소엽수성은 그 당시 돌궐의 영향력아래 있었으나 고선지가 안서도호부 수장으로 있을 때 머나먼 이곳까지 원정해 점령했다. 당의 장군 고선지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하고, 이들이 당에 바치는 조공을 감독했다. 하지만 당의 신하이기에 앞서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선지는 바다처럼 큰 이식쿨 호수를 바라보면서 아버지 고사계로부터 들은 요동반도 앞의 서해와 발해의 바다를 생각했으리라. 

되 아슈 패스와 우드멕 패스를 넘어 탈라스 텐산 산맥에서 발원한 탈라스 강을 따라 탈라스 시로 달렸는데 탈라스 강을 따라 내려오니 광활한 탈라스 평원과 그 때 전투에 죽은 병사들의 무덤인 ‘쿠르간’이 나타났다. 저 멀리 고선지가 지휘하는 군대와 아랍연합군이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듯했다.

조지 소로스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군은 키르기스 텐산 산맥을 넘어 달려왔고, 아랍군은 탈라스 텐산 산맥을 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이 아랍군에게 패배한 탈라스평원의 전투가 한번 있었던 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의 심켄트시 부근의 따라스시에서 첫 전투가 있었고 아랍군과 내통한 케르룩 유목민의 반란으로 당군이 퇴각하면서 아틀라흐에서 벌인 2차 전투가 있었다. 탈라스 평원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아랍연합군의 마지막 전쟁터였다. 이 전투 결과 당은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그 전투의 파장은 문명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당군 가운데 많은 기술자가 아랍으로 잡혀가 당의 새로운 기술이 서양에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종이와 더불어 화공과 직조기술도 서방세계에 전파됐다.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에 남겨진 벽화는 8세기 말의 두 소구드 왕이 세력 싸움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기사들의 눈매가 동양인으로 묘사된 것은 이 때 잡혔던 중국인 화공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마르칸트의 압프라시압 벽화에 남겨진 고구려인 무사들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당에게 멸망한 고구려와 타지까지 끌려와 고초를 겪었던 유민들의 고된 삶을 떠올리니 무보다 나라는 영원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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