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사회
민족의 한(恨) 서린 벌교에 말을 걸다
  • 김은지 기자
  • 승인 2006.09.01 00:00
  • 호수 1526
  • 댓글 0

줄거리

조정래의 대작 『태백산맥』은 전라남도 벌교를 무대로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형 염상진과 그 반대로 우익행동대장으로 좌익토벌에 앞장서는 동생 염상구를 중심으로 해방부터 분단까지 우리 역사의 격동의 순간들을 그려내고 있다. 무당의 딸 소화, 농민 출신 빨치산으로 상진에게 충성하는 하대치,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 고뇌하는 지식인 김범우등 무려 60여명에 달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연세춘추

▲ 과거의 피비린내 나던 기억을 잊은 듯, 지금 중도방죽에는 벼만이 무성히 자라고 있다.
태백산맥이 지형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소설 『태백산맥』은 민족 삶의 터전에 서린 지기(地氣)와 민족 정기의 주맥(主脈)으로 상징되는 분단 문학의 대표적인 대하소설이다. 서울에서 약 5시간 정도의 긴 여정을 거친 후 비로소 우리 민족의 분단과 상잔의 역사적 현실이 깊게 드리워진 『태백산맥』의 무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가리키는 팻말이 내게 손짓한다.

평생에 한번쯤은 읽어볼 법한 소설 『태백산맥』은 일제 말기부터 해방과 여순 반란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을 대서사시처럼 엮어낸 대하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은 1980년대까지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사회주의자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작가 조정래는 지난 1994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4월 법원이 최종 무혐의 처분을 내림에 따라 11년 만에 무거운 족쇄를 벗게 됐다. 그의 눈을 통해 그려진 소설 『태백산맥』은 남해안의 한 포구인 벌교에서부터 조계산, 지리산, 태백산, 거제포로수용소 등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격동의 역사를 원고지 1만 6천여장의 방대한 분량속에 담아냈다.

벌교행 버스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만나게 된 것은 아니나 다를까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억센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는 한 할머니께서 말을 건네신다. “학상, 어디 갈라고 그러는디?”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보다 오히려 “어디서 오셨소? 밥은 자셨소?”라고 나직하게 건네는 벌교 주민들의 소박하고도 정겨운 물음에는 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어렴풋한 고향의 향수며, 서로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동족상잔의 터전, 벌교읍

이곳은 일정시대부터 도시화가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다른 곳 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지주는 지주대로 땅만 믿고 있는 재래지주가 아니라 사업을 겸하고 있는 신식지주가 많고,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눈 열리고 귀가 열려 아는 게 많습니다.

소설 중 김범우는 새로 부임해온 사령관 심재모에게 벌교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지만 오늘날 벌교 주민들은 군청 소재지인 보성읍보다 벌교읍의 인구가 6백여 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 등기소, 농촌지도소가 보성읍으로 하나 둘 옮겨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주민 서만홍씨(50)는 “최근 벌교읍 주민들이 순천으로의 행정구역 변경을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며 아쉬운 눈빛을 전했다.

그 자리는 더 이를데 없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산줄기가 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문득 다리 쉼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중턱 조금 아래에다 펑퍼짐한 평지를 이루어 놓고는 다시 아래로 내리 뻗친 것이다. 그러니 그 터는 후덕한 부인네가 치마폭을 펼쳐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올리는 형상이라는 것이었다…그 터는 눈여겨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묘함을 느끼게 했다.

안타까운 벌교의 소식에 걱정스런 마음을 뒤로 한 채, 친일의 상징인 벚나무들 사이로 곧게 뻗은 야산 중턱에 올라서자 『태백산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현부자네 집이 보인다. 이곳은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과 마을 외곽의 무당 딸인 소화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지만, 흔히 볼 수 없는 일본 양식의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특히 문간채 위에 마련된 위엄도 당당한 누(樓)가 눈길을 끈다. 누에 올라 보니 멀리 논이 보인다. 그렇다. 이 누는 자신의 논에 벼가 익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소작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감시할 수 있게끔 지주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세월의 먼지가 수북이 쌓였지만, 50년이란 세월을 넘어서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과의 첨예한 대립 구도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소설 속 현장을 실감케 해주는 다리가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사람 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본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지만 일제의 강점기였던 쇼와(昭和) 6년에 건립됐다하여 이름 붙여진 소화다리를 건너고 나니 기분이 엄숙해진다. 당시 즉결 처형을 감행했던 일명 '피의 다리'인 이 소화다리에서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아래 벌교천에서 사람의 허벅지뼈가 걸려나오기도 했단다. 지금은 인도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의미 때문에 건너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더 숙연케 한다. 소화다리 너머로 웃자란 갈대숲 역시 당시 시체를 묻어 피비린내를 부르는 비극의 역사를 담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할 뿐이다.

처절한 삶의 역정의 종착지

▲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횡갯다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사연을 남겼을까?
/사진 유재동 기자 woodvill@ 윤영필 기자 holinam@
이곳 벌교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2년간 거주하며 여순 반란 사건의 아픈 현장을 어린 소년의 눈으로 지켜봤을 작가 조정래의 흔적과 체취를 느끼며 걷다보니 보물 제 304호로 지정된 아치형 석교, 횡갯다리가 눈앞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엔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어 현재의 벌교(筏橋·떼다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횡갯다리에 서서 언덕 위를 마주 바라다보니, 품격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 노인과 그의 아들이자 극단적 이념대치의 상황에서 번민하는 지식인 김범우의 인생이 그대로 배어있는 기와집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문 안에 안채로 가는 중문이 또 있고 사랑채와 문간채에도 각각 문이 있는 전형적인 양반집. 40년 전에 이사를 오셨다는 이곳의 김씨 할머니께 『태백산맥』의 이야기를 꺼내자, “태백산맥 거시기로 해서 보러 왔소?”하시며 “엊그저께도 멀리 서울에서 학상들이 왔든디, 나보기는 볼게 없는데 자꾸 와”라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소개를 해주신다. 낡아만 가는 볼 것 없는 집이지만 사람들이 이 집을 찾는 것은 격동의 시기에 고뇌하던 지식인 김범우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려는 절박한 시대의 요구 속에 소설 『태백산맥』이 존재했고, 이는 작가의 역사 의식이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당대 현실을 대변하는 역사적 거울

벌교를 떠나 서울로 향하는 버스는 과거 소작농들이 등이 휘도록 돌을 져 나르고, 인민재판을 벌이는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가 널렸던 중도방죽을 스쳐 지난다.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아프게 가해졌던 고통과 상처를, 그리고 결코 고민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숙제이자 염원인 분단 극복의 과정까지를 소설이란 장치로 다시금 재생시켜 놓은 『태백산맥』, 그것은 소설 밖의 현실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이고 처절한 우리 역사의 또 하나의 발자국이 아닐까.

/글 김은지 기자 eunji85@

김은지 기자  eunji85@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은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