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금융산업구조개선에관한법률」 위반, 삼성상용차 분식회계 의혹, 엑스파일 사건, 이재용씨 사전 상속과 관련한 탈세 의혹 등 최근 삼성은 뜨거운 이슈메이커다.
선거철이 끝나면 여지없이 불법선거 자금 비리가 불거졌어도 제공자의 명단에 삼성이 오른 적은 많지 않았다. 삼성의 탈법과 비리에 대한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재벌이나 대기업에 비해 삼성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미지에 흠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비리 의혹이 아닌, 지난 5월 있었던 고려대 사태다.
사실 고려대 사태는 학생들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데모 이후에 보여준 학교 당국, 삼성 및 주요 언론사들의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삼성의 노조 불인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이건희 회장에 대한 학위 수여를 반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학교 당국도 있고 그것을 축하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 가운데 학위수여도 하고 만찬장에서 에피소드로 얘기할 수 있는 정도의 일 아닌가.
그런데 학생 데모에 불쾌감을 느낀 이회장은 만찬에 불참하고 고려대 총장은 이회장에게 사죄하였으며 보직 교수들은 사퇴를 결의하였다. 총동창회와 총학생회도 데모 학생들을 비난하고 학칙에 따른 징계까지 거론하였다. 주요 언론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학생들에 대한 비난에 동참하였다. 삼성의 힘이 얼마나 크기에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날 일에 저 난리가 났단 말인가?
이렇게 되자 진보적인 지식인 계층에서는 이 사건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학생들의 특강 반대 데모로 교문 앞에서 되돌아갔던 때와 비교하면서 ‘삼성공화국’론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데모 학생들을 비난하는 쪽이 더 많았고 삼성공화국론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두 달 후 MBC 이상호 기자의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삼성공화국론은 나라를 다시 뜨겁게 달구게 되었고, 벌써 석 달이 지나는데도 그 끝이 안 보인다. 그리고 삼성공화국론을 말할 때는 늘 ‘5월의 고려대 사태’부터 시작한다. 불과 다섯 달도 안 지났는데 그 당시 데모 학생들은 이제 비난을 받기는커녕 선각자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명 ‘5월의 고려대 사태’는 삼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던 소수 학생들에게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들이 오늘의 이런 변화까지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과 오늘의 변화 사이에는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X파일 사건의 MBC 이상호 기자가 ‘내가 학생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어디선가 말했듯이 그것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역사를 큰 사건 중심으로 기억하지만 그런 사건의 앞에는 늘 개인이 있었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 이상호, 신디 시한 등이 그렇다. 아이러니컬 한 점은 역사를 만든 계기는 그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개인에게 억압을 가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자초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