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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의 혼을 불러 오늘에 되살리다"한국적인 조형정신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것을 녹여내야…"
  • 최종혁 기자
  • 승인 2005.09.20 00:00
  • 호수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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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연륜이 묻어나는 정양모 교수의 눈길과 손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날카롭다. 신나리 기자 jounari@yonsei.ac.kr

한국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품은 도자기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백자의 순수한 미는 작위를 거부하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미의식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 속 갯벌에서 건져낸 청자의 은은한 옥빛에서 우러져 나오는 고귀함처럼 우리나라는 화려한 도자기 문화를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이 깃든 도자기와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경기대 전통예술감정대학원 정양모 석좌교수다.


문화재 인생 40년


조선 제일의 궁궐 경복궁 옆에 위치한 정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살며시 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조선 후기 청화백자 두 점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정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정 교수의 연구실에는 책자 가득 꽂힌 책과 난 화분 몇개 외에는 ‘도자기 전문갗라는 수식어가 무색하리만큼 단 한 점의 고물(古物)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기자가 의아해 하자 정 교수는 “그런 건 박물관에 있어야지 내가 가지고 있으면 쓰나”라며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기자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정교수는 지난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에 첫 발을 들여 놓은 뒤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지금까지 도자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박물관원이 되면서 정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 미술사가이자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혜곡 최순우 선생과 같은 과에서 일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처음에는 고고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함께 일했던 최 선생의 인품과 학식에 젖어들어 미술사를 넓게 섭렵하기 시작했다”면서 도자기를 연구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그렇게 시작한 정 교수의 도자기 인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마터 발굴과 신안해저유물 발굴 성과를 이뤄냈다.

정 교수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책상 위에 있던 연상(硯床)을 예로 들어 한국의 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한국의 예술품은 생활에서 출발한다”고 첫 머리를 늘어놓은 정 교수는 “재료인 먹감나무는 자연이 만든 것이고,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며 연상을 직접 열어서 보여줬다. 실제로 그 벼루함의 무늬는 마치 먹으로 그린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은 자연 그대로였고, 아래의 빈 공간에도 서랍을 만들어 붓이나 먹을 넣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한국적인 조형정신


도자기의 경우 한중일 모두 오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는 감상을 주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인공미가 가해져 있지만 우리 도자기들은 모두 실생활에서 사용했던 것”이고 “그렇다고 예술성을 배제한 것도 아니니 실생활 속에서 감상이 절로 이루어 졌다”며 생활과 괴리가 되지 않은 우리 예술의 특성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또한 그는 “일본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전까지 백자 문화가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며 왜란 당시 일본이 잡아간 도공에 의해 일본의 백자 역사가 우리로부터 시작됐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우리는 유럽과 일본에 비해 한 참 뒤져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 교수는 “도자기에는 그 도자기를 만든 도공의 철학, 미적 감각, 조형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며 “우리는 우리 정신에 뿌리를 둔 조형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국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우고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우리의 도자기 역시 그 전쟁에 뛰어 들어 과거 화려했던 도자기 문화를 부활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적인 것의 모방이 아니라 그러한 한국적인 조형정신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것을 녹여내야만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내가 집을 이루고, 집이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국가를 이루듯 나의 제일 큰 단위는 국갚라며 “자신의 주관, 한국의 정신을 갖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면 국가, 민족 역시 발전해 나갈 것이다”고 정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부전자전


위당 정인보 선생의 7남인 정 교수를 만나면서 위당 선생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정 교수가 문화재 분야에 평생을 바쳤다면 그의 아버지인 위당 선생은 한국학 분야에 모든 것을 바쳤다. 정 교수는 “아버지는 한국이 낳은 진정한 국학자”라며 자랑스러워했다. “30,40년대의 기억은 뚜렷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연희전문에서 문학, 언어학, 사학 등을 강의하며 항상 국혼(國婚)을 강조 하셨다”고 전했다.

그리고 지조와 절개를 강조했던 위당 선생은 그 자식들에게도 엄격하셨다. 위당 선생의 곧은 의지로 일제시대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정 교수는 “너는 왜 창씨개명을 하지 않느냐고 담임선생님한테 많이 혼났다”며 “우리 반에서 마지막까지 창씨개명을 안 한 학생은 나 뿐 이었다”고 수십 년 전 기억을 회상했다. 위당 선생이 납북 된 6·25가 일어나던 해 위당 선생은 정 교수에게 “나는 어찌 될지 모르니 너희들이라도 어서 피신하여 씨라도 남겨야 한다”며 단호히 어디로든 떠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 교수는 “그 때 함께 모시고 갔어야 하는 건데… 너무 어려서 몰랐었지”라며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정 교수의 큰형님은 평생 평교사로 지내시며 진정한 가르침을 펼쳤고, 셋째누님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양완 교수는 국문학의 중진 여류 학자로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강화학 분야의 국내 최고 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정 교수는 “이러한 아버지, 형, 누님들이 진정한 학자지 나는 사이비 학자”라며 자신을 낮추지만 그가 걸어온 40년의 도자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순백의 백자 같았던 그의 아버지가 ‘민족의 얼’을 강조했듯이 정양모 교수 역시 ‘우리 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웠던 18,9세기의 청화백자를 들여다 보는 정 교수.

최종혁 기자  bokusip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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