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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석] 희망, 떨칠 수 없는 매력뮤지컬「밑바닥에서」
  • 김혜미 기자
  • 승인 2005.09.12 00:00
  • 호수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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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었다. 백양로를 거니는 무수한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은데 내 얼굴은, 아니 내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버린 날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이 내 등에 실려서 그 짐을 벗어놓으려고 해도 길을 찾을 수 없어 한없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러시아의 한 선술집을 찾아갔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끼의 소설 ‘밤 주막’을 재조명한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우리에게 원작보다 살갑게 다가온다. 음울한 분위기의 어느 선술집에서 나와 닮은 구석이 많아 서글픈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삶을 근근히 이어간다. 미혼모 출신의 선술집 주인 타냐, 그녀가 자신의 엄마인지 모르며 불치병에 걸린 안나, 5년의 복역을 마치고 막 감옥에서 출소한 페페르, 사랑을 기다리다가 돈과 명예를 택한 바실리사, 진실된 사랑을 믿기에는 지쳐버린 매춘부 라스짜 등이 서로 얽혀 지내며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러던 중 이들에게 혜성처럼 눈부신 존재가 나타난다.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소녀 나타샤가 선술집으로 희망을 몰고온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긍정적 희망이 밑바닥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삶은 절망감에 더욱 뒤죽박죽 돼버린다.

애초에 그들에게 나타샤가 가져온 희망은 달갑지 않았다. 그들에게 희망은 오히려 버겁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뮤지컬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라는 지극히 아름답고 상쾌한 말을 더럽혀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가?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사실은 미련이라는 말 대신에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거창하게 보이려고 희망이라 붙인 것은 아닌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노래한 어느 가수가 ‘미련한 미련’이라 부른 것이 사실은 이와 같지 않을까. 인생이란 원래 장르를 가늠할 수 없는 한 편의 영화이고 우리 모두는 해피엔딩을 바란다. 그것이 현실에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지만 공연 내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나서 두려웠다.

하지만 희망은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둠속에 침잠해있던 그들에게 쏘인 실날같은 빛줄기는 분명 그들속에 꿈틀대는 잠재력을 불러내왔다. 무엇보다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배우'의 표호가 그 영향력의 증거다. 알코올 중독에 걸려 잊어버린 이름 대신 ‘배우’라 불렸던 그. 그런 그가 자신을 되찾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열창은 온 극장을 휩싸고 돌아와 뇌리에 박혔다. 비록 고달플지라도 인생에서 주인공은 자기자신이라는 믿음을 작은 테이블을 무대 삼아 소리친 그의 노래는 호소력있게 느껴졌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장면 곳곳에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등장인물들은 다들 부족함을 지니고 있다. 모자람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연민은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나타샤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기 시작한 ‘블라디보스톡의 봄’을 하나 둘씩 따라부르며 어느덧 노래는 독주에서 합창으로 변한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어디론가 향하고 싶어하는 가사가 귓속에 꽂혀 들어와 머릿속을 맴돈다. 모르는 사이에 박수를 치는 자신을 발견하며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유대감을 싹틔우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소극장이기에 대형 뮤지컬과는 다른 생생함과 진한 여운이 남는다. 결코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대사에서 우리도 그들과 같음을 깨닫고 가슴 한 켠이 저며온다. 그들처럼 희망의 다른 이름인 미련을 삶의 원동력으로 한걸음씩 나아 가면서 마음 속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울림을 놓치지 말자. 오는 9월 30일까지. 관객의 호응이 계속된다면 오픈런 예정이다. (문의:☎ 745-2124)


/ 김혜미 기자 lovelyham@yonsei.ac.kr

김혜미 기자  lovelyha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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