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도: 지난 8월 1일부터 6일까지 연세춘추를 비롯한 전국 25개 학보사 기자 30명은 문화일보와 국가보훈처의 후원아래, 중국 항일
유적을 탐방했습니다. 이번 탐방의 의의는 일제 치하 나라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겨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연세춘추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번 중국 항일 유적 탐방을 특집으로 기획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당하자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서간도 지역에는 경학사, 부민단, 신흥강습소 등이 조직,
운영됐다. 그리고 북간도 지역에서는 명동촌이 독립운동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은 이 지역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독립운동의 확대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3·1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무렵 국내에서는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한민족은 곧 이것이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을 간파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투쟁방략이었음을 절감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됐으며 모든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7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편성됐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에 침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했는데 대표적 무장투쟁으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봉오동 전투지는 현재 봉오동댐의 물에 잠겨 살펴볼 수가 없다. 청산리 전투기념비는 청산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큰 위용은 자랑하지만 심하게
파손이 돼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이국땅에 현충시설물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존,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한편 청산리
전투의 주역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김좌진장군이, 중국 연변학계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특히 만주지역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난립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 통합, 분열되기도 했는데 결국 1925년에는 압록강 연안지역을 기반으로 한 참의부, 남만주의 정의부,
그리고 김좌진, 김혁이 중심이 된 신민부 등 삼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김좌진이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활동했던 산시는 해림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시에서는 김좌진이 저격당한 금성 정미소 등을 들러볼 수 있으며 아울러 해림의 한중우의공원에서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체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번에 필자가 한중우의공원내에 만든 전시관은 국내의 것과는 달리 통일지향적, 한중우의적
측면에서 만들어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 화룡소재의 청산리대첩기념비.
청산리대첩의 성과를 기리기 위해 설립됐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