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도: 지난 8월 1일부터 6일까지 연세춘추를 비롯한 전국 25개 학보사 기자 30명은 문화일보와 국가보훈처의 후원아래, 중국 항일 유적을 탐방했습니다. 이번 탐방의 의의는 일제 치하 나라독립을 위해 싸운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겨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연세춘추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번 중국 항일 유적 탐방을 특집으로 기획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하얼빈 근교의 731부대. 1933년 일본육군참모본부가 생물무기를 만들기 위해 설립한 부대로써 한국인, 중국인 등을 잔혹하게 생체실험했다. 731부대는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투항할 때 증거물을 소각하고 폭파하여 상당수의 유적물이 소실돼 현재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 산시에 소재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구거소. 장군은 장군은 1928년부터 이 자택에 살면서 홍진, 이청천, 김종진, 황희수 등과 함께 대일항일을 모색했다. 김좌진 장군의 흉상(앞)과 장군이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한 금성정미소(뒤)가 보인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 상해에 소재한 옛 임시정부청사. 임시정부가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흉구공우너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매우 낡고 도로 옆에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만큼 초라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1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한 짧은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으며 2~3층에는 당시 가구, 서적,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1910년을 전후하여 중국 동북3성(아래 만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활발히 전개됐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독립전쟁론이란 일제는 필연적으로 중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미일전쟁을 유발하게 될 것이므로 그러한 전쟁발발시 한국인은 대일독립전쟁을 감행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민은 무장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하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게 됐다. 그 첫단계 사업은 바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집단적으로 해외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안은 신민회에 의해 구체화됐으니 이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중국동북지역에 한민족을 집단적으로 망명시키고자 했다. ▲ 백두산 천지의 정경. 백두산은 함경남도, 함경북도와 중국 길림성이 접하는 국경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최고봉의 산으로서 해발 2천 744미터, 총면적은 8천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오래전부터 한민족의 발상지로 숭배돼온 영산이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당하자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서간도 지역에는 경학사, 부민단, 신흥강습소 등이 조직, 운영됐다. 그리고 북간도 지역에서는 명동촌이 독립운동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은 이 지역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독립운동의 확대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3·1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무렵 국내에서는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한민족은 곧 이것이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을 간파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투쟁방략이었음을 절감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됐으며 모든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7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편성됐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에 침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했는데 대표적 무장투쟁으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봉오동 전투지는 현재 봉오동댐의 물에 잠겨 살펴볼 수가 없다. 청산리 전투기념비는 청산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큰 위용은 자랑하지만 심하게 파손이 돼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한다. 이국땅에 현충시설물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존,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한편 청산리 전투의 주역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김좌진장군이, 중국 연변학계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 313반일의사릉.1919년 3월 13일 약 3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거행된 연길의 반일운동 기념비다. 당시 만세운동으로 사망한 13명의 묘소가 안치돼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 윤동주 시인의 생가. 용정시 소재.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유학중이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의문사했다. 그는 일제말기의 암흑기 저항문학의 대표적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특히 만주지역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난립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 통합, 분열되기도 했는데 결국 1925년에는 압록강 연안지역을 기반으로 한 참의부, 남만주의 정의부, 그리고 김좌진, 김혁이 중심이 된 신민부 등 삼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김좌진이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활동했던 산시는 해림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시에서는 김좌진이 저격당한 금성 정미소 등을 들러볼 수 있으며 아울러 해림의 한중우의공원에서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체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번에 필자가 한중우의공원내에 만든 전시관은 국내의 것과는 달리 통일지향적, 한중우의적 측면에서 만들어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 용정시 소재의 대성중학교. 지난 1966년 옛 건물을 헐어내고 복원해 대성중학교의 후신인 용정중학교의 역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성중학교는 1921년 석호준과 임창세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수많은 항일공산주의자들을 배출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해림에서 차로 5시간거리의 하얼빈역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다. 그러나 안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에는 큰 역사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토가 죽은 장소는 화단으로 변해있을뿐 아무런 표식도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은 북만주에서, 조선혁명군은 남만주에서 일제에 대항해 한중연합전선을 결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한국독립군이 참전한 대표적 전투로는 대전자령 전투, 조선혁명군의 경우는 영릉가전투를 들 수 있다. 이처럼 활발하게 투쟁을 전재하던 중 한국독립군은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1933년 중국본토로 이동하게 됐다. 이에 잔여부대는 최악, 안태진 등의 지휘하에 목릉, 밀산 등 산림지대로 옮기며 유격전을 전개했다. 한편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혁명군은 이미 1932년부터 간부진이 남경 방면을 왕래하며 중국 정부에 지원교섭을 벌였으며 주로 남경, 광주 방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새로운 항일전을 준비했다.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인들과 연합해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등을 조직,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중 국내진공작전으로는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전투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 및 그 성격에 대해 중국학계에서는 많은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학계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체계적 정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아울러 이를 보다 객관적이고 총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북한 측과의 공동 조사 및 답사 역시 긴급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글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 목단강시 강변공원에 위치한 팔녀투강비. 조선족 여인 2명을 포함한 8명의 항일여군이 일본군 포위를 피해 투신한 용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 북한과 중국의 국경 도문시. 두만강 북안에 위치해있으며 철교, 인도교로 북한 남양과 통하고 있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 화룡소재의 청산리대첩기념비. 청산리대첩의 성과를 기리기 위해 설립됐다. /위정호 기자 maksannom@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