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상을 이끈 철학과 문학의 거장

2005년은 우리대학교가 창립 120주년을 맞는 기념적인 해이자 20세기 철학의 거장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프랑스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지정했으며 사르트르가 태어난 오는 6월 21일을 전후로 세계 각국에서는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고자 활발한 학술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사르트르.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전 세계는 그를 주목하는가?

주체와 자유의 철학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가 내세운 실존주의는 거대한 해일이 육지를 뒤덮어 곳곳에 물이 스며들 듯 전세계를 강타했고 대중의 삶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실존주의에서는 의지와 노력에 의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인간 의지의 자율성이 강조된다”는 박이문 특별초빙교수(학부대학·분석철학/불문학)의 말처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실존주의는 어둠속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과학과 이성,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반발로써 나타나게 됐다”며 한국외대 철학과 박치완 교수는 설명한다. 과학혁명 이후 물질중심사회가 돼버린 현실에서 실존주의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우연성(偶然性)’과 ‘무상성(無償性)’으로 대표된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상명대 불어교육학과 박정자 교수는 “인생은 우연하고 무상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런 쓸모없는 잉여적인 존재이고, 그 삶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며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파악하는 인간의 삶을 설명한다. 그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이 바닷가 조약돌을 주웠을 때, 포크를 잡았을 때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당혹함에 구토를 느끼는 것처럼 인간은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잉여적 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무상성(無償性)을 띠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하기에 사르트르는 ‘개인의 책임’을 중시한다. 하이데거가 ‘던져진 현존재’라고 일컬은 그 인간 존재의 본질에 가치를 스스로가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개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구축해 나가며 삶의 목적을 스스로 확정해야 한다”는 박정자 교수의 말처럼 잉여적 존재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뿐인 것이다.

의식을 지닌 인간은 항상 불안정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 이것은 대자(對自)와 즉자(卽自)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대자는 인간의 의식을 말하고, 즉자는 의식을 제외한 모든 사물을 일컫는다. 의식을 지닌 인간은 항상 불안정 하기에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즉자적인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본질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행동하는 지식인

사르트르는 2차 대전의 참전 포로가 되기 전까지는 실존주의 사상을 내포하는 작품을 쓰는 젊은 문학 청년이었지만 그 이후 헤겔, 마르크스 등을 접하면서 좌파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때 바로 그의 참여론이 여실히 드러나는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갱를 발표한다. 그 후에도 시위참여나 청원서 작성, 선동 연설 등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중간에 위치한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혜택과 피지배계급의 소외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상향탈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을 위한 하향탈계급이 돼야 한다고 사르트르는 주장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갱에서 ‘바나나는 막 땄을 때 가장 맛있다’고 말한 것 처럼 작가는 현실의 문제에 직시, 민중,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노벨상이 부르주아의 잔치라며 거부했다. 또한 그의 연인이었던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지식인이었다. 박이문 교수는 “그는 자유로운 존재로 남고 싶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있었지만 공산당으로부터 탈당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펼쳤다고 전했다. 또한, 박치완 교수는 “사르트르는 지식인과 대중을 구분하고 대중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길을 제시해주는 일을 해야한다며 주장했다”고 그의 참여론을 설명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하지만 사르트르는 역설적이게도 19세기 작가 플로베르의 전기적 내용을 담은 3천 매 분량의 『집안의 백캥라는 작품을 말년에 내 놓는다. 플로베르가 누구던가. 그는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갱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부르주아 작가였다. 또한 사르트르는 『집안의 백캥가 초기의 저작 『상상적인 것』의 속편과도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상상적인 것』에서 사르트르는 그림을 예로 들어 자신의 미학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예술 작품은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감각적 물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물들과 일차적으로는 똑같지만 우리는 화가의 그림에서는 감동을 느끼고 책상, 침대 등에서는 그런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예술 작품에는 일반 사물에는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림의 물질성을 넘어서서 그 뒤에 나타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으며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즉, 바로 작품 안에 들어있는 비현실의 물체때문에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설명하고 있는 자신의 미학이론이다. 이는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도구로서의 참여문학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정자 교수는 “『집안의 백캥가 『상상적인 것』의 속편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민중을 위한 참여문학을 부르짖었지만 결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와 버린 한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르트르, 그 후

그렇다면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 사르트르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지침서가 된 실존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그 방법론으로 사용된 대자와 즉자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더불어 박치완 교수는 “사르트르는 철학적인 사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중화에 성공했다”며 철학의 대중화에 대해 그 의미를 밝혔다. “사르트르의 미학과, ‘없음’이 미를 발생킨다는 데리다의 미학은 놀랍게도 유사하다”는 박정자 교수의 말처럼 실존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라는 상반된 사조에서도 비슷한 미학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사르트르의 미학은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사르트르가 글과 행동으로 보여준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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