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학문, 연세의 정통이 되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사회의 발전은 바로 그 ‘아니오’에서부터 시작된다. 왕양명(1472~1528)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던 명나라 때, 이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나섰다. 왕양명의 양명학은 엄격한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도 흘러 들어왔지만 학문의 다양성과 다원화를 인정하지 않던 조선조에서는 수용되지 못하고 주류 학문에서 도외시됐다. 하지만 양명학 연구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조선적인 것, 한국적인 것으로 연구 발전시켜온 학문이 있으니 바로 강화학이다.

명나라의 양명학과 한국의 강화학

조선 후기의 정칟사회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던 주자학 일색의 분위기 속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대안적 사상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양명학이고 그 중의 한 갈래가 강화학이다. 강화학이라는 이름은 지난 2월에 타계한 고(故) 서여 민영규 명예교수(우리대학교·동양사)에 의해 명명됐다. 강화학은 시조 정제두에서부터 이건창·이건방 형제, 그리고 위당 정인보(1892~1950?)로 이어져 오는 학파에 의해 연구된 학문을 일컫는다. 정제두가 말년에 강화도 진강산 아래 정착해 학문을 연구했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 곳을 사상적 회귀처로 추억하여 민교수가 강화도의 지명을 빌어 강화학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라고 할 수 있는 퇴계는 양명학을 이단 사설이라 배척했다. 왜냐하면 양명학이 주자의 정교한 지적(知的)체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주자학이 주장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체계를 거부하고 치양지(致良知)를 강조한다. ‘천하의 사물은 그 이치를 궁구해 가다보면 어느날 갑자기 그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앎을 이루자’는 것이 양명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는 지행합일(知行合一)로 연결된다.

하지만 “강화학은 양명학을 수용하되 조선 고유의 주체적 사유를 형성한 것이다”는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의 말처럼 강화학이 곧 양명학은 아니다. 강화학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자학적인 인식론을 재차 수용하거나 한학의 실증적 학풍을 도입하기도 했고, 유학적 사유의 틀만을 고수하지 않고 도교와 불교까지 받아들였다. 그런 다양한 사상들의 융합으로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지는 몰라도, “내면을 닦는데 힘쓰고 자기를 충실히 할 것(專於內實已)”이라는 강화학파 이광사의 말에서 다양한 모습의 강화학이더라도 내적 연계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심교수는 “강화학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과 유교개신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의도했다”며 양명학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국학 연구를 발전시키는데 힘썼음을 말했다. 만약 조선이 실질적인 면을 중시한 강화학을 받아들였더라면 위정척사의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국제관계가 아니라 평화적이고 개방적인 국제관계가 정립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사농공상의 평등사회가 구현돼 경제성장이 이뤄져 부국강병의 역사가 전개돼 일제 식민지와 같은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강화학의 요람,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 온 우리대학교는 강화학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연희전문 교수였던 위당과 그의 직계 제자이자 강화학의 마지막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민교수가 연세의 터전에서 학문을 쌓고 또 그 학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위당은 조선 양명학의 계보를 발굴하고 민족적 실학의 흐름과 내용을 밝힘으로써 사상사연구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그 소산이 바로 『양명학연론』이다. 또한 강화학의 학맥을 이어 강화학의 전통과 실학을 접목시켜 강화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민족 주체의식을 강조한 양명학적 실학을 강조한 것이다. 서여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국의 양명학에 ‘강화학’이라는 이름을 안겨준 인물이다. 종래 학계에서 규정하던 양명학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을 갖고 그 뿌리를 찾아낸 것이다. 또한 그는 이념보다는 실질을 존중하는 강화학의 정신을 학문 전반으로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근대 유학사 전개 과정을 몸소 체험한 마지막 증언자라는 것이다.

서여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엔 그의 학문을 이어받은 학자가 없다. 위당의 딸이자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양완 교수는 “아버지의 뒤를 이은 민교수가 없었더라면 한국학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서여의 타계를 너무나 안타까워 했다. 과거 소수였던 학문은 현재에도 소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정교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가슴에 와 닿는다. “서여의 학문을 잇는 학자가 없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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