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교수를 만나다

12줄로 한국 음악의 멋스러움을 표현할 줄 아는 우리시대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교수.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침향무」, 「비단길」, 「미궁」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공연예술평가협회의 예술가상, 에밀레 대상 수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또한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로 초빙됐고, 현재는 이화여대 음악대학 명예교수를 맡고 있으며 우리대학교에서도 특강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야금의 산 증인 황병기 교수를 만나봤다.

황교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한참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여느 집과는 확연히 다르게 깨끗하고 단아한 느낌의 3층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아한 한옥집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깔끔한 양옥집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조심조심 몇 개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그의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가야금이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널찍한 공간이 좁아 보일 정도로 많은 책들이 놓여있는 서재 역시 인상적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황교수가 가야금과 함께 해온 세월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일흔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황교수, 느릿느릿 다가와 옅은 미소와 함께 앉으시고는 이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놓았다.

그에게 일상이 돼버린 가야금

황교수가 가야금을 처음 접했던 때는 1951년, 한국전쟁으로 한창 나라가 어수선했을 때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음악반을 했었는데 노래를 잘 불러서 KBS에 출현하기도 했다”며 “그때부터 악기를 하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의 말처럼 음악은 어린 시절, 그의 호기심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인기에 ‘악기’에 대해서는 엄두도 못내고 있던 중,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갔던 ‘고전무용연구소’라는 곳에서 들은 가야금 소리는 그의 인생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우연히 들었던 한 노인의 가야금 소리에 매혹돼서 평생 동안 가야금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가야금은 숙명이었을까. 그 날 처음 접했던 소리는 중학생이던 그에게 가야금을 배우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이미 큰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야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전쟁의 혼란과 절망과는 상관없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가야금은 내 생활”이라며 “아침에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처음 가야금에 매혹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연습을 쉰 적이 없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가야금이 없는 하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가야금 연습시간은 하나의 일상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에게 애초부터 가야금에 전부를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가야금을 직업으로 갖겠다는 마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아무 목적없이 순수하게 가야금이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황교수는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황교수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는 사실 자체가 무언가 큰 사연이 있을 것 같아 특별한 얘기를 기대하고 질문하는 기자에게 그는 “나는 그 당시 법대 공부가 하고 싶어서 내 의지대로 지원했다”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다. 사실 황교수 자신에게는 그 일이 그리 중요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했던 그는, 지금은 결국 ‘가야금’과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지만 대학 시절을 후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법학 공부를 하면서도 물론 가야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황교수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그의 가야금에 대한 열정은 훌륭한 작품의 생산을 통해 드러난다. 최초의 독주곡인 「숲」을 비롯해서 여러 곡들이 있는데 그 중 「침향무」는 “신라시대의 미술을 음악에서 추구한 작품”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난 1975년 연주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던 「미궁」은 인간의 육성과 가야금 소리를 결합시켜 고도의 음악적 완성을 이뤄낸 황병기의 영원한 화제작으로 평가된다. “황병기의 작품은 신비로운 영감에 찬 동양화의 수채화 같다. 극도로 섬세한 주법으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음악에서 청정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는 「뉴욕타임즈」의 평가 역시 그의 음악적 경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전통음악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이 시대에 우리도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야 된다”며 “미술이나 문학 분야에서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옛 음악만 연주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황교수. ‘국악과 현대서양음악의 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또 한번 명쾌한 생각을 들려준다. “방향과 그 시도 자체는 매우 좋다. 예술적 완성도가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찬성이다.”

황교수에게서 자신이 연주하는 ‘국악’을 더 사랑해줬으면 하는 욕심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다. 현재 우리대학교 ‘전통음악의 이해’ 수업을 맡고 있는 황교수는 수업에서 큰 만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이 열심히 듣고, 예전보다 국악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아졌다”며 국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호의적으로 바라봤다. 황교수가 가야금을 처음 구입했던 때만 하더라도 1년에 25대 정도만 만들어지던 가야금이, 이제는 1년에 7천여대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또한 ‘국악방송’도 따로 운영되고 있고 국악 공연도 많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는 선물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70여년 동안 살아보니 대학생 때가 가장 행복했고 가장 즐거운 것이 배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를 미래에 대한 준비 과정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생 최고의 시절에 진리탐구와 청춘을 만끽하라”고 당부했다. “현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며 살며시 미소짓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현재를 충실하게 즐겼던 그의 마음가짐이 황교수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시대의 가야금의 명인이지만 그는 자신이 음악을 하는 이유에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단지 ‘가야금이 좋았다’는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 진정한 음악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천년 세월을 자랑하는 가야금 소리와 함께 황교수의 예술혼도 우리 마음에 은은한 울림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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