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자, 정혜'

여자, 정혜. 그녀의 일상은 아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냥 미지근하게 졸졸졸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항상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고 있다.

정혜는 시끄러운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매일 똑같은 길을 따라 우체국으로 향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다시 그 길을 따라 조그만 아파트로 돌아와 홈쇼핑을 즐겨보는 그녀에게 더이상 행복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도 정혜에게는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웃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영화 내내 웃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정혜의 모습은 항상 건조한 것일까. 그 실마리는 바로 ‘기억’에 있다.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존재가 사람이라지만 정혜는 너무 한꺼번에 상처를 많이 받아버렸다. 어린시절, 친척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정혜는 “남자와 첫 성관계가 어땠냐”는 첫날밤 남편의 질문에 “아팠다”며 그 상처를 겨우 떠올린다. 끝까지 정혜의 편이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까지 그녀에게 상처를 안겨준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은 더이상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원래 나쁜 기억은 오래가는거야”라는 엄마의 대사처럼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정혜는 예전의 기억들을 문득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는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정혜는 많이 무뎌졌다. 힘들고 슬픈 기억들 앞에서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그 장면을 순간순간 떠올렸다가 금세 지워버리고는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제 정혜의 건조함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상처로 얼룩져버린 그녀의 아픔은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여유마저 빼앗아버려 그녀를 가두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 드디어 정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상처를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낸 것이다. 엉엉 소리내서 한참을 울고 나서야 이 영화에도 ‘배경음악’이 나오기 시작한다. 어느 날부턴가 얼어붙은 정혜의 마음을 움직였던 남자는 “정혜씨”라고 나지막이 그녀를 부르고 있다. 이제 정혜는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지만 곧 싹트게 될 사랑을 스크린에 남겨둔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쩌면 당황스럽게 느껴질 법한 결말이지만, 상처를 안고 사는 한 여자에게는 여기까지 오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올해 무려 7개 국제영화제에서 초청을 받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감성영화, 『여자, 정혜』. 화려한 명성만큼 영화는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조용한 녹차향이 묻어나는 여자, 정혜는 봄비처럼 다가와 가만히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리며 조용히 속삭인다.‘이제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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