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고고학자 손보기 교수

 

뗀석기, 간석기, 주먹도끼, 찍개, 자르개 등의 용어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됐다는 사실도 우리는 고등학교 국사시간을 통해 알고 있다. 한국의 금속활자가 세계최초이며, 이의 견고함 또한 매우 뛰어남을 그동안 익히 들어왔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겐 매우 익숙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처음부터 통용됐던 것은 아니다. 23년간 우리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박물관장을 맡았던 손보기 교수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인 것이다. 한국의 사학을 이끈, 여든 살을 넘긴 원로학자가 빵모자를 멋지게도 비스듬히 쓴 채 편안한 웃음을 던지며 다가온다.


고고학과 역사학은 나의 길


손교수를 한국 최고의 사학자이자 고고학자로 만든 건 단연 그가 학문에 대해 가진 순수한 열정이다. 그렇다면 그가 역사나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손교수는 연희전문을 다니던 까마득한 시절을 회상한다. “내가 연희전문에 입학할 당시, 정인보 선생은 이미 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일제의 탄압으로 우리의 것은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문과를 다니던 손교수가 배울 수 있었던 학문은 영문학이 거의 유일했다. 따라서 그는 한국적인 것이 몹시도 배고팠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금속활자에 대한 책을 접하게 됐다. 그 이후로 한국의 금속활자의 연대와 금속성분 등을 밝혀내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이어서 손교수는 처음으로 문화재를 발굴했던 기억을 더듬는다. 바로 호우명 그릇이 나온 경주 호우총. 당시 한국에 있던 일본인은 자국의 패전으로 인해 8월 15일을 마지막 날로 모두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때 호우총이 발견됐지만, 우리나라에는 호우총에 있는 유물을 안전하게 발굴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총독부 박물관의 책임자였던 일본인 고고학자 유광교일(有光校一)에게 호우총 발굴을 특별 요청하고, 이 발굴팀에 손교수가 함께 참여한다. “그 일본인은 호우명 그릇을 조심스레 잡고서, 이런 토기는 생전 처음봤다며 손을 벌벌 떨었다”고 손교수는 얘기한다. 이어서 그는 “그 모습을 보고 과거 유물을 발굴하는 작업의 희열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더욱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옛것을 찾아내기로 마음 먹었다”고 고고학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계기를 밝힌다.


공주석장리 유물 발견과 순우리말


지난 1964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이 발굴된다. 그동안 단군시대, 즉 청동기시대 정도로 여겨졌던 우리의 역사가 적어도 3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손교수는 “석장리 유적을 처음 찾은 것은 한국의 선사시대 유적 조사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미국인 대학원 학생, 앨버트 모어와 그의 아내 샘플이었다”고 얘기한다. 모어는 석장리의 무너진 층에서 뗀석기를 찾아 손교수에게 보여준다. 그후 손교수는 구석기 유적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모어와 함께 석장리 유적을 찾고, 또 다른 석기를 발견한다. 이로써 손교수는 석장리 유적을 발굴해야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가진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석장리 발굴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손교수는 얘기한다. “그들은 일본에도 없는 구석기 유물이 어떻게 한국에서 나올 수 있냐는 논리를 들이대며,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나올리가 없다고 못박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교수는 여러차례 정부측과 협상해 결국 발굴 허가를 받아냈고, 우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발굴 작업을 맡아 석장리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 “처음에는 석장리 유물이 쏟아져 나옴에도 이를 구석기 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손교수는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하지만 손교수는 지난 1967년 미국 앤 아르보 국제학회에서 처음으로 석장리 유물 발굴 결과를 발표하고,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낸다. 손교수는 “당시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구석기가 나온 사실에 입을 짝 벌렸고, 결국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을 받았다”며 당시 느꼈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얘기한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10년 동안 이뤄진 석장리 유물 발굴은 우리 역사의 시작점을 오랜 시간 전으로 올려놓는 계기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았다. 손교수는 고고학에 관한 순우리말 용어를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 타제석기, 마제석기라 불리던 어려운 한자말이 뗀석기, 간석기로 이름이 바뀌고, 찍개, 긁개, 주먹도끼, 찌르개, 몸돌, 밀개 등 뗀석기의 유물 하나하나가 순우리말 이름을 가지게 됐다. 이로써 고고학이 여러 학문 분야 가운데 순우리말 용어가 가장 많은 학문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우수성을 발견하다


손교수의 또하나 위대한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금속활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발명 연대를 앞당기고, 그 성분을 분석해 냈다는 것이다. 손교수는 지난 1973년 「실학방법에 의한 인쇄기술 연구」란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 금속활자 발명 연대가 당시까지 알려진 것보다 70여년 앞선 1160년대라고 밝혔다. 「고문진보대전」을 토대로 고활자를 감정한 결과다.

 

더불어 손교수는 금속공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에게 부탁해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성분을 분석하고, 그 결과 금속에 아연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날에도 아연은 합금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아연합금은 작은 글자 획을 뚜렷하게 하고, 물이나 먹에도 쉽게 산화되지 않아 보관이 용이하다”고 아연이 금속활자의 성분으로 있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다. 구텐베르크 활자를 비롯한 여타의 금속활자에서는 아연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손교수는 이로써 한국 금속활자의 우수성과 그 연대를 밝혀, 처음 자신이 사학에 관심을 갖게 만든 그 꿈을 이뤘다.

 

“선사시대의 유물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자연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그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손교수는 유물 발굴을 하면서 얻게 된 깨달음을 젊은 학생들에게 전한다. “문화는 그냥 생겨난 게 아니며,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고 이에 슬기롭게 적응해 나간 조상들의 지혜”라는 것이다. 과거의 것을 등한시하고 막연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대석학의 위대한 업적은 우리를 압도했지만, 연신 웃으며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손교수의 순수함은 영락없는 친근한 이웃 할아버지였다. 학문이 즐거웠던 그의 열정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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