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타학교 이성친구에게 「연세춘추」를 건네주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1980년대 「연세춘추」는 연세인들의 긍지요, 정체성이었다. 지령 1500호를 맞이한 지금, 「연세춘추」는 69세의 나이로 쇠락할 것인가, 자랑스러운 과거보다 더 밝은 미래를 만들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지난 14일 상남경영관에서는 낮 1시30분부터 30여 명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참석한 ‘연세춘추 지령 1500호 기념 학술회의’가 열렸다.

 

1부에서는 「연세춘추」 신촌 주간 김기정 교수(사회대·국제정치)의 사회로 ‘한국의 대학과 대학언론’에 대한 주제가 다뤄졌다. 먼저 김성호 교수(사회대·정치사상)가 ‘한국의 대학개혁과 대학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발제한데 이어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정연구 교수는 ‘대학의 소통구조와 대학 언론’에 대해 발표했다.

 

1시간 남짓한 발표가 끝난 후 토론시간이 이어졌다. 토론자로 참석한 신경숙 교수(문과대·19세기영시)는 “입학 후 백양로 거리에서 처음 집은 것이 「연세춘추」였다”는 회상을 시작으로 「연세춘추」의 역할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학생 공동체의 관심사를 수렴하고 그 관심사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확장시키는 것이 대학언론의 몫”이라고 설명한 신교수는, 「연세춘추」가 이러한 학내 의사소통의 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신교수는 “하지만 지금의 「연세춘추」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현실을 꼬집으며, “‘교조적 진보와 말초적 감각의 어설픈 조합’으로 인해 대학언론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신교수는 「연세춘추」는 학내 의사소통의 공간이자 기관지로 남고 싶어 하지만, 파이를 먹고 또 가질 수는 없듯이 언젠가는 선택의 시간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세춘추」 원주 주간 배득종 교수(정경대·재정분석/전자정부)는 “「연세춘추」가 20년 후에도 남아서 지령 2000호를 맞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토론을 시작했다. 배교수는 “지금의 활자 매체와 같은 ‘다(多) 대 일(一), 일 대 다’의 형식은 머지 않아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다 대 다’의 형식으로 바뀔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배교수는 이러한 시대적 추이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시대에는 오히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춘추」는 형식면에서는 ‘다 대 다’이되 내용면에서는 ‘일 대 일’이 돼야 한다”는 배교수의 지적은 시대적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함과 동시에, 언론으로서의 고민의 깊이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함을 당부하고 있었다.

 

김기정 교수는 “권력, 자본, 지식은 서로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식의 기본 토대는 점점 약화돼가고, 더불어 자본에의 복속과 이에 따른 압박감은 대학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정 교수는 덧붙여 “대학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대학언론 역시 변해야 한다”며 다변화된 소통수단 속에 묻히지 않기 위한 「연세춘추」의 노력이 절실함을 강조했다. 김기정 교수는 “「연세춘추」는 지난 1980년대 형성됐던 교수와 학생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보다 활발하고 다각적인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며 1부 토론회를 정리했다.

 

이어진 2부 회의는 낮 3시부터 이어졌다. ‘지령 1500호와 연세춘추의 발자취’를 주제로 이어진 2부 좌담회는 「연세춘추」에 몸담았던 전(前) 편집인 및 편집국장이 참석해 가족 같은 단란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사회는 「연세춘추」 편집인 유석호 교수(문과대·불소설)가 맡았고, 전인초 교수(문과대·중국소설), 박영필 교수(공과대·계산응용및충격역학), 양승함 교수(사회대·비교정치) 그리고 김경모 교수(사회대·커뮤니케이션론)가 참석해 「연세춘추」시절의 경험담을 나눴다.

 

전교수는 우리 역사의 혼란기였던 지난 1980년대 주간으로 「연세춘추」에 몸담았다. 전교수는 당시 가장 힘들었던 점을 ‘외부의 탄압’으로 꼽았다. “한 부, 한 부 발행할 때마다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는 전교수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감시 속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학생기자를 보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전교수는 대학신문에 전문성을 부여하고 학부생들로 이뤄진 학생기자들의 소양을 넓혀주고자 대학원생 위원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이어 지난 1990년대 초 「연세춘추」 주간 및 편집인을 역임한 박교수는 “총장선출 등 학내 문제로 인한 어려움이 많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 당시 학내 민감한 사안 때문에 「연세춘추」가 주목받았다면서 “총장, 교수, 학생 3자간의 갈등으로 탄원서를 수 백 통 받았었다”는 박교수는 “편집인, 주간교수, 기자가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양교수는 지난 1999년부터 4년 동안 「연세춘추」 편집인을 지냈다. “「연세춘추」 편집인을 지내며 두통이 생겼다”는 양교수는 학생기자와의 마찰을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꼽았다. ‘백지사설 사건’으로 인해 기자와 마찰이 있었지만 4년 동안 “학생과 교수의 벽을 허문 것 같다”며 편집인 시절의 성과를 밝혔다.

 

마지막 토론자인 김경모 교수는 52기 동인으로 지난 1985년 「연세춘추」 편집국장을 지냈다. 김경모 교수는 선배의 입장에서 학생기자 시절의 경험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당시는 반정부 운동이 거세게 일고, 기관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던 시절이었다. 김경모 교수는 “「연세춘추」는 대학신문 최초로 순한글체, 가로짜기 편집을 시도한 국학의 정신이 살아 있는 신문”이라며 그 자긍심을 나타냈다.

 

「연세춘추」의 발전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을 묻는 유교수의 질문에 많은 의견이 오갔다. 먼저 전교수는 “누가 주도권을 갖고 신문을 만드느냐보다는 어떻게 만들어야 독자들이 많이 읽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소수를 위한 신문에서 벗어나 학내 구성원 모두를 위한 신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고, 양교수는 “읽히는 신문, 바로잡는 신문, 앞서가는 신문이 돼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김경모 교수는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를 이루고 ‘학문도 소식도 새로운 신문’을 만들라”고 말했다.

 

지령 1500호를 돌파한 「연세춘추」. 하지만 자랑스러운 전통의 이면에는 대학언론, 더 나아가 대학의 위기가 숨어 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학언론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지난 시간에 대한 회고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작은 빛을 발견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고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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