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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춘추로 본 '연세'의 발자취

편집자 주 :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역사학자 카(E.H.Carr)의 말처럼, 역사는 단순한 기록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 유효한 성찰의 지침을 제공합니다. 이에 지령 1500호를 맞아, 우리대학교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기념호인 1000호 이후부터 1500호에 이르기까지 「연세춘추」의 보도기사를 바탕으로 연세의 역사를 재구성해봤습니다. 지난 「연세춘추」 의 기사 정리와 보충취재를 통해 기사를 구성했으며, 시간 순으로 기사를 배열했습니다.


취재 및 정리 :

김유나 기자, 송은림 기자, 이나래 기자, 최하나 기자

나은정 기자, 문예란 기자, 이상민 기자, 조상준 기자 coz0001@yonsei.ac.kr


사진 :

「연세춘추」 자료사진

1987년 이한열·1996년 노수석 열사 시위 도중 사망

민주화를 향한 두 불꽃, 타오르다


지난 1987년과 1996년, 불의에 항거하던 두 젊은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대학교를 대표하는 열사, 이한열군(당시 20, 경영·2)과 노수석군(당시 20, 법학·2)이 바로 그들이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의 정의를 이루고자 자신의 몸을 던졌던 이들의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왔다.

‘광주시민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와 비디오를 보며 그동안 사회의 무풍지대에 살아온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다’는 고(故) 이한열 열사는 지난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 대회는 그 해 봄 경찰의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씨의 사망 1백일 추모 전야 행사였으며 이한열 열사는 시위대의 진두에서 전경을 저지하는 사수대를 맡고 있었다.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 발사된 경찰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은 반독재·민주화를 위한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1987년 6월 29일자)

한편 고(故) 노수석 열사는 지난 1996년 3월 29일 ‘등록금 인상반대 및 대통령 비자금 공개 요구’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다. 이는 시위가 평화적이었음에도 경찰이 시위대의 해산 차원을 넘어서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검거하고자 폭력행사와 함께 퇴로를 차단하는 토끼몰이식 진압을 강행한 결과였다.(19 96년 4월 1일자) 그러나 노수석 열사의 가족이 지난 1998년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고 부검 결과 밝혀진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므로 사망 원인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패소한 후(2003년 3월 24일자) 4년이 2003년에야 비로소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인정으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2004년 4월 5일자)

매년 법과대 학생회와 함께 노수석 열사의 추모 행사를 준비해온 노수석 열사 추모 사업회장 윤찬영 동문(지난 1999년 천문대기과학과 마침)은 “재학생뿐 아니라 열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졸업생들마저도 당시의 마음을 잃어가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한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올해에는 학내 사업을 중점으로 두고 각 단대의 신입생 수련회 자료집과 학내 언론사를 통해 열사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6월 10일 이한열 열사의 추모 행사를 준비한 상경대 역시 학생들의 의식부족으로 인한 추모 행사 참여율 저조를 만회하기 위해 이제까지 민중 가요패에 제한돼 있던 각 단대 동아리의 공연을 락, 대중가요 등으로 다양화했다.

“얼마 전 이한열 열사의 영정이 훼손된 사건이 발생해 안타깝다”며, “많은 이들이 공공의 목표를 위해 벌인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법과대 학생회장 한지숙양(법학·4)의 말처럼 이제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 그날의 희생을 진정 가슴으로 기억해야 할 때다.

1983년 생협의 모태 형성

연세인의 복지 위한 생협설립


고를샘, 알뜰샘, 하얀샘, 보람샘…. 연세인들은 학교에서의 많은 시간을 다양한 ‘샘’에서 보내지만 정작 그 곳을 누가 관리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샘’들의 어머니, 그것은 바로 생활협동조합(아래 생협)이다.

생협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지난 1994년 말이지만, 그 모태는 지난 1983년에 형성됐다. 1980년대 초 대학생 과외금지 조치로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여의치 못했다. 게다가 빈번했던 학생시위를 우려한 당시 정권은 학내 자금이 학생 복지에 지원되는 것까지 감시해 학생들의 복지 상황은 형편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대학교 일부 학생들은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이 학교에서 쓴 돈을 임대매장에 의해 학교 외부로 나가지 않게 하고 학교에서 직접 매장을 운영해 그 돈이 학생들에게 환원되도록 하는 방안을 학교 측에 건의했다. 이에 학교 측은 “학내 수익사업에 학교가 직접 나설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고, 결국 문제를 제기한 ‘학도호국단’이 직접 사업을 맡기로 했다.

처음 시작은 미약했다. 그들이 운영하는 것은 단지 자판기 17대와 학관 1층의 매점뿐이었다. 하지만 직접 운영하는 이들은 동료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이용하는 이들은 이 돈이 결국 자신에게 환원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지난 1990년대에 들어 직영 매장이 늘어나 이들을 통합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학생만이 아닌 학내 모든 구성원이 이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지난 1994년 12월 16일 생협이 공식적으로 창립됐다.(1995년 1월 1일자) 우리대학교의 생협은 현재 학내 거의 모든 매점과 식당을 비롯해 커피전문점, 기념품점을 관리쪾운영하고 있다. 또한 학내 구성원들의 복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후생복지회관의 건립을 추진 중이고, 근래에는 학내 구성원의 관심 환기와 수익금 환원을 위해 매학기 ‘조합원 한마당’, ‘문화기행’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생협의 모태가 형성된 때부터 생협에 몸담고 있는 김민우 과장은 “초창기에는 사업이 잘 돼서 수익금의 환원이 원활하게 되면 우리대학교를 ‘등록금 없는 학교’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지금 생각하면 치기어린 생각을 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김과장은 “생협에 대한 학내 구성원들의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며, “일례로 학생식당의 메뉴에 대해 앉아서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협에 건의하는 등, 단지 고객으로서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참여가 필요하다”며 생협의 설립 취지를 환기시켰다.

모든 연세인이 단돈 3백원으로 친구와 커피를 마실 수 있고 다른 학교에 비해 비교적 싼 가격에 문구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생협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10여개 대학에만 이러한 생협이 존재한다고 하니, 생협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1988년 총여탄생

총여학생회 탄생 등 학내 여성주의



“연세대학교는 여권이 비교적 신장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내 모든 행사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학생은 소외되고 있는 상황에서 총여학생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지난 1988년 3월 우리대학교 남녀공학 58년의 역사 속에서 출범한 총여학생회(아래 총여) 회장 이은희 동문(지난 1991년 철학과 마침)이 「연세춘추」 당선소감에서 한 말이다.(1988년 3월 28일자) 당시 전체 학생 중 여학생은 24.7%로 소수여서 남학생들의 활동에 끌려 다니는 경향이 있었으며, 과·동아리에서도 ‘장’의 자리보다는 보조적인 위치에 설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시위의 과격함 때문에 동참하려는 여학생들은 ‘남성화’를 강요받는 등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학생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여성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 총여는 총학생회 산하 ‘여학생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편이었고, 선거에서 여학생들은 70%가 넘는 투표율과 90% 이상의 지지를 보냈다.(1988년 3월 28일자) 이은경 동문(지난 1991년 도서관학과 마침)은 “여학생들의 의사를 대변해줄 어떤 기구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 총여의 탄생은 여학생들 사이에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총여는 출범 이래 그 위상이 모호하고 여성주의 담론을 학생들에게 확산시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지난 1995년 ‘성정치 문화제’, 1998년 ‘미인대회 반대 문화제’ 등 매년 남성중심의 캠퍼스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행사를 열어왔으며, 2000년 2월부터는 ‘새내기배움터 반성폭력 내규’를 제정해 시행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여학생처’는 지난 1956년 설립된 이래 ‘성과 인간관계’, ‘여성과 건강’ 등의 과목과 성폭력상담실 개설, 반성폭력학칙 제정 등 남녀평등적인 교육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2002년에는 ‘여성인력개발연구원’이 발족돼 여학생들의 원활한 사회진출과 지도력 향상을 위해 교육 및 진로지도 등을 위한 학내외적인 활동을 수행해왔다.

타 대학들은 총여가 없거나 여학생처 대신 명목상의 성폭력상담소가 마련돼 있는 경우가 많아 여성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내기 힘든 실정이다. 반면 우리대학교는 총여, 여학생처 외에도 ‘반성폭력주체’, ‘연세성폭력뿌리뽑기연대’ 등 활발한 여성주의 자치모임이 존재해 여성주의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내는 편이다. 현재 우리대학교 여학생 비율은 40% 정도. 우리대학교가 타 대학에 비해 여학생의 권리가 많이 보장된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들 단체를 비롯해 우리대학교가 ‘여학생의 권리와 남녀평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1984년 총학생회 부활

뜨거운 관심 속 부활한 총학


2004년으로 41대를 맞은 총학생회(아래 총학)의 역사는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총학이 지난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학원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부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총학의 형태는 1949년 정부가 학생층의 사상통일 및 반공교육 실시를 명목으로 건립한 학생자치단체인 학도호국단에서 그 효시를 찾을 수 있다. 초창기 설립된 학도호국단은 그 반민주적 체제로 인해 지난 1960년 4·19 혁명 이후 해체됐고, 지난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총학이 설립돼 그 기능을 계승했다. 그러나 지난 1975년 당시 문화교육부가 제정한 ‘학도호국단 시행세칙’에 따라 학도호국단은 또다시 부활됐으며 직선제이던 학생대표 선출 방식도 임명으로 바뀌어 학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후 지난 1983년 12월, 정부는 대학의 자율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한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고, 이는 총학 부활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학생들은 총학의 부활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지난 1984년 9월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가 개최한 ‘새로운 총학 건립을 위한 공청회(아래 공청회)’에는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짐작하게 한다. 공청회에서 학생들은, ‘군대조직과 유사한 위계질서의 학도호국단이 학생자치기구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학생들의 전체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총학 건립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또한 학도호국단의 운영규칙에는 학생들의 정치활동 금지와 집단행위 제한 등의 조항이 있어 자율적 학생자치활동을 제한하고 있었다.(1984년 9월 10일자)

그러나 학교 측은 학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지난 1984년 10월 구성된 21대 총학을 ‘불법’ 판정하기도 했다.(1984년 9월 17일자) 이는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에도 학생활동의 조건을 제한할 것을 강요해온 정부의 입장과 맥락을 같이해 학생들의 비난을 샀다. 결국 학원자율화 미보장의 근본적 이유가 정부 측에 있다고 판단한 학생들은 지난 1984년 11월, 당시 제1야당인 민정당사에서 ▲학도호국단 폐지 ▲총학 인정 등 14개 항목을 요구하며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1984년 11월 19일자) 이에 정부는 이와 관련된 학생회칙을 확정함으로써 총학 부활을 사실상 인정하게 된다.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총학생회’로 제 이름을 찾은 20여 년 동안 총학을 보는 학생들의 인식도 변화를 거듭해왔다. 지난 1980년대의 총학생회장 선거는 총학이 부활한 첫 해인 지난 1984년 65.1%, 이듬해인 지난 1985년 71.9%의 투표율을 기록할 정도로 학생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했다. 이는 자율적 학생자치단체를 원하는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을 뿐 아니라,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당시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참여 부족으로 연장투표를 하고도 그 정당성이 의문시됐던 지난 2003년 총학 선거를 되돌아볼 때, 20여 년의 역사가 남긴 너무도 급격한 변화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1988년 이래 총장 선출과정에서 계속돼 온 학내 갈등

최초 직선제에서 간선제, 다시 직선제로


학내 구성원의 신뢰를 기반으로 구성원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총장. 그러나 우리대학교는 그동안의 총장 선출과정에서 크고 작은 진통을 겪어왔다.

우리나라 「사립학교법」 제53조 1항 “각급학교 장은 장의 학교를 설칟경영하는 학교법인 또는 사립학교 경영자가 임면한다”에 따라 우리대학교도 총장임면에 재단이사회(아래 이사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지난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불기 시작한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총장 선출방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지난 1988년 창립된 교수평의회(아래 교평)는 이러한 학내 여론을 수렴해 개교 이래 처음으로 11대 박영식 총장이 교수직선제(아래 직선제)로 선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988년 8월 8일자) 당시 직선제는 전체 교수들의 직접선거로 2명의 총장 후보를 선출, 이사회에 추천하면 이사회가 이 2명의 후보와 동문회 및 각 교파에서 추천한 후보들 가운데서 총장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후 학내 구성원인 직원과 학생이 총장선출 과정에서 배제되는 등 직선제의 한계가 지적되는 한편, 이사회가 간선제를 추진함에 따라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2대 송자 총장 선출은 11대와 같은 직선제가 적용됐는데, 이 과정에서 직원의 참여를 요구하는 직원노동조합(아래 직원노조)이 독자적인 총장후보자 선출선거를 실시하기도 했다.(199 2년 7월 27일자) 지난 1996년 13대, 지난 2000년 14대 총장선출 과정에서는 이사회가 교수·직원·학생 대표 등으로 ‘총장후보추천위원회(아래 총추위)’를 구성하고 총추위가 총장후보자를 추천하면 이사회가 최종 임명하는 방식인 간선제를 실시해, 교평과 학생측의 비판을 받았다. 교평은 ‘간선제는 총추위의 구성방법, 총장후보자 선정을 위한 시간적 제약 등 내용·절차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총학생회 또한 ‘민주화에 역행하고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1996년 5월 20일자) 교평은 직선제를 고수했으나 결국 총추위에서 추천된 김병수 총장과 김우식 총장이 각각 선임됐다.

이런 갈등은 지난 학기 15대 총장선출 과정에도 이어졌다. 이사회와 교평은 각자 총장후보자 모집 공고를 내 혼란을 야기했으며, 교평이 총추위에의 중복등록을 금지하자, 직원노조는 직원의 참여를 배제한다는 이유로 교평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직원노조가 교평의 ‘총장후보자 소견발표’를 저지하기 위해 루스채플에 진입, 단상을 점거하는 등 갈등이 극에 달했으나, 교평과 직원노조의 협상이 직원 10%가 총장후보 선출에 참여하는 것으로 극적 타결돼 교평의 직선제와 직원노조의 참여 요구가 수용된 방식에 의해 15대 정창영 총장이 선임됐다.(2004년 3월 15일자~4월 12일자)

직·간선제를 거치며 총장 선출방식은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제도로 정착해왔다. 하지만 학내 구성원인 직원과 학생의 참여 확대, 선거운동 과열 등 직선제 시행에 따른 부작용 방지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1996년 광역학부제 도입

학부제 실시로 모집단위 대변화



‘연세 21세기 계획’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대학교는 지난 1991년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학부제의 길을 열었다.

지난 1995년 7월 교육부가 ‘학과통합 정책추진 계획’을 발표해 각 대학에 적극 추진을 권장하자 우리대학교는 ‘대학계열화 방안 연구 위원회’를 구성, 계열화 방안을 마련했다.(1995년 3월 13일자) 당시 우리대학교의 학부제 방안은 정부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와 맞물려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에 작성돼 학생과 교수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일방적인 발표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 해 동안 숱한 논란을 거듭하며 수정과 첨삭을 되풀이하던 학부제는 지난 1996년 이과대와 공과대, 신과대 및 사회대 등 4개 단과대라는 큰 틀 아래 학부제와 계열·준계열화로 공동 시행됐다.(1995년 5월 1일자)

학부제 도입 후 우리대학교는 지난 2000년 모집단위를 광역화해 인문, 사회, 이학, 공학, 의·치의학, 예·체능계열 등 6개 모집단위로, 2001년에는 생활과학계열과 신학계열을 분리해 총 8개의 모집단위로 변경, 보완했다. 또한 지난 2003년에는 사회계열 중 상경대학이 상경·경영대학으로 분리됐고 2004년 사회학 전공이 인문계열에서 사회계열로 소속 변경됨으로써 광역학부제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편 원주캠은 ‘본교와 원주캠 교차 이중전공 인정제’를 골자로 한 학부제를 실시했다. 3개 단과대와 23개 학과를 ‘인문사회계열’과 ‘자연과학계열’의 2개 계열로 나눠 선발했으며 원주캠내 또는 본교와 원주캠 간의 이중 전공 및 다중 전공이 가능하게 됐다.(1995년 9월 25일자)

학부제는 학문의 성격이 유사하거나 보완적인 학과들을 통폐합함으로써 학문간의 유기적 연계를 도모하고 하나의 행정 단위로 운영되는 학부단위 중심체제다. 이 제도는 ▲학생의 다중전공 기회확대 ▲전공선택 기회 확대 ▲신입생 학력수준의 균질화 등 교육 환경 개선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시행된지 8년째를 맞는 지금 도입 당시 우려했던 ▲인기학과 편중 ▲비효율적 분반 및 학사관리 ▲커리큘럼·수업의 질 저하 ▲소속감 부재 등의 부정적 측면이 제기되고 있다.(2000년 1월 1일자 )

최근 각 대학들이 학부제 폐지론을 거론하며 ‘소학부제’나 이전의 ‘학과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대학교 역시 이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신중한 논의와 협의를 통해 제도를 개선하고 올바른 제도를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2001년 원주캠 환경공인 인증 획득

친환경 캠퍼스로의 도약


지난 2001년 11월 환경 공인인증 획득으로 친환경캠퍼스로 거듭나고 있는 우리대학교 원주캠퍼스는 1970년대 건립 당시 수도권 인구억제를 위한 지방분산정책의 하나로 서울권 사립대학의 제 2캠퍼스 확장 흐름에 맞춰 설립됐다.

원주캠은 지난 1977년 12월 우리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를 시작으로 1981년 1월 8일 원주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인문사회학부와 자연과학부를 포함한 원주대학과 의학부를 포함한 원주의과대학으로 분리됐다. 이후 1984년 원주대학이 매지리로 옮겨감에 따라 매지캠과 일산캠을 아우르는 원주캠퍼스가 탄생했다.

원주캠은 설립 당시 ‘공부하는 캠퍼스’, ‘새롭게 비약하는 캠퍼스’란 이념을 바탕으로 출범했지만 학교가 점차 비대해짐에 따라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1980년대에는 기숙사 부족 문제와 매점과 식당의 시설 미비 등 학생복지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됐고, 법정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는 도서시설, 부족한 강의공간 등은 캠퍼스 확장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주캠은 지속적으로 미비한 시설을 확충하고 본교와 차별화된 특성화 교육을 실현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현재는 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과 의공학연구소 등 지역사회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원주캠은 자연환경이 수려한 입지조건을 이용해 ▲물질순환형 캠퍼스 ▲에너지 및 자원 절약형 캠퍼스 ▲자연공생형 캠퍼스를 표방하는 ‘에코 캠퍼스’ 도입방안을 모색했다. 이로써 원주캠은 체계적인 환경친화형 마스터플랜을 정립, 캠퍼스 내부와 주변환경의 조화를 이루도록 했고 지난 2001년 1월 국내 대학 최초로 ‘교육행정 서비스에 대한 환경경영시스템’ 인증인 ISO 14001을 획득함으로써 미래지향적으로 캠퍼스를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2001년 11월 26일자) 인증취득 후에도 폐기물을 전문위탁업체에 맡겨 체계적으로 처리하고, 실험 중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설비를 구입하는 등의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2002년 7월에는 국내대학 최초로 한국표준협회 국제표준시스템 경영대상을 차례로 수상했다.(20 03년 3월 3일자)

ISO 14001 획득에 심혈을 기울였던 전 이대운 원주부총장은 “이러한 환경문화와 의식은 개인만이 아닌 우리 연세 구성원 모두의 협력으로 구축해 나감으로써 이뤄지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친환경적인 에코캠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며 원주캠의 지속적인 발전과 노력을 기대했다.

현재 원주캠이 국내외적으로 환경캠퍼스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더욱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운영으로 21세기 무한경쟁 시대 속에서 앞서 나가는 대학으로 발전시켜야 할 때다.


1996년 한총련사태와 종합관 이념교육관화 논란

투쟁과 억업, '한총련 사태'


12대의 헬리콥터, 쇠파이프, 곤봉, 빨간 최루액. 지난 1996년 8월 우리대학교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일명 ‘한총련 사태’를 알고 있는가.

한총련 사태란 지난 1996년 8월 12일부터 9일 동안 우리대학교 종합관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한총련)과 정부, 경찰측의 마찰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12일부터 사흘 동안 한총련 주최로 ‘7차 범민족대회’와 ‘6차 범민족청년학생연합 통일 대축전’ 행사가 개최됐다. 한총련은 이 행사에 참가할 북한측 학생들을 영접하기 위해 10일 한총련 대표로 우리대학교 도종화군(지난 1993년 기계공학과 입학)과 조선대 류세홍군을 파견하고, 이들 두 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통일축전을 열어 판문점으로의 행진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강력히 저지하자 판문점으로의 행진이 좌절된 약 2만명의 한총련 학생들은 우리대학교를 거점으로 농성에 들어갔고 경찰은 이 행사를 ‘친북적 성향이 강한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진압에 들어갔다.(1996년 9월 2일자)

이에 따라 20일 경찰은 드디어 종합관과 과학관에 대한 진압작전을 실시, 3천여명의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총학생회장 박병언군(지난 1992년 기계공학과 입학)을 수배하고 학생회 간부를 포함한 40명을 구속, 연행했다. 경찰청은 그해 9월 2일 ‘시위참가자 4백65명 중 4백38명을 좥집회및시위에 관한법률좦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였다’고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희 일경은 머리에 돌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으며 이외에도 8백64명의 전경과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1996년 9월 2일자)

사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총련 사태로 불에 탄 종합관 복구와 관련해 지난 1996년 8월 21일 “종합관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이념 교육현장으로 보전되길 바란다”는 전 김병수 총장의 발언으로 ‘종합관 이념 교육관화’ 논란이 크게 제기됐다. 교수평의회는 “신성한 학원에서 폭력이 자행됐다는 점에서 일정공간을 현장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98년 9월 7일자) ‘이념 교육관’은 한총련 사태 현장을 그대로 유지·보존함으로써 ‘반공사상’을 일깨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한총련을 ‘빨갱이’로 몰아 사상적 탄압을 할 수 있었기에 학생회측은 “종합관에는 단 한치의 이념전시실도 들어설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러한 학교와 학생측의 첨예한 대립 끝에 종합관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구됐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학생들이 마치 포로처럼 잡혀가고 잿물과 연기가 진동하던 그때의 참담한 모습들은 잊을 수가 없다”는 총무처 관재부 강대숙 부처장의 말처럼 우리는 그때의 흔적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03년 연합신학대학원 건립을 둘러싼 학내 갈등

연세신학선교센터 건립 논란


교육권과 환경론의 대립으로 지난 2003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연세신학선교센터(아래 선교센터) 건립 논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현재 한경관 옆에 위치한 옛 연합신학대학원(아래 연신원) 부지에서는 50%의 공사 진척률을 보이며 지상 4층 지하 4층으로 계획된 선교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 2001년 학교측은 연신원 건물이 위험철거판정을 받아 안전 문제가 나타나고 신학과 학생 수용 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연신원을 철거, 선교센터 건립을 추진하기로 발표했다.(2003년 7월 28일자) 이 계획에 대해 교수들로 구성된 ‘연신원 지키기 및 에코캠퍼스를 위한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는 “역사가 담긴 옛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것은 생태 환경과 정신적 교육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천막 농성을 벌였다. 이에 신과대 측은 자연 보존에 공감은 하지만 캠퍼스는 교육권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내보이며 강하게 맞섰다.

이러한 대책위와 신과대의 마찰이 계속되는 가운데 학교측은 지난 1월 27일 새벽 2시경 연신원 건물을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이에 학생들이 ‘연세대무단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책위 김용민 교수(문과대·독문학)가 단식 투쟁에 돌입하는 등 규탄의 목소리가 높았다.(2003년 3월 3일자)

한편, 학교본부는 수차례의 ‘대표자회의’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시공사와의 계약 이행 등으로 더 이상 공사를 미룰 수 없게 되자 문과대·신과대 학장 및 교학부장 등으로 구성된 ‘6인 위원회’를 개최, 지난 2003년 5월 29일 합의안을 도출했다.(2003년 7월 28일자) 그러나 ‘6인 위원회’에 학생 참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에 반발한 ‘연세대무단철거대책위원회’ 등 몇몇 학생들이 확성기 시위를 벌였다.

‘선교센터 건립 논란’은 ‘교육’과 ‘환경’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대학내의 중요한 두 가치를 놓고 벌인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님비’와 ‘팽창주의에 기반한 난개발의 표상’으로 모는 비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학교본부는 기습 철거로 밀어붙이기식 행정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냈고, 학내 구성원들의 극한 대립 상황에서 중재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현재 건립되고 있는 선교센터가 교육과 환경의 조화를 이루며 새롭게 거듭나길 바란다.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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