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철 교수 인터뷰>

“나는 빨리 죽더라도 후배들이 연구할 수 있는 풍토만은 확실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정년을 5년 앞두고 43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 사회과학 대학원(가칭)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오세철 교수(퇴임·조직행동)는 명예퇴임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이같이 밝힌다. 신자유주의의 기승으로 좌파 학문에 대한 연구가 더욱 어려워질터,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교수는 이어서 “타협을 전제로 하는 진영 및 NL세력이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의 주류”라 지적하며,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역량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는 ‘계급적 좌파세력’이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교수는 “대학교 2학년 때 동대문의 한 고서점에서 『자본론』을 구해 혼자서 열심히 읽었다”며 젊은 시절 자신의 학문적 열정을 회상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오교수를 지금의 실천적 활동가로 변모시킨 사람은 바로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경영학과의 두 제자들이었다. 첫번째 제자는 경영학과 76학번 강성구 동문. “중무장한 전투경찰과 사복경찰들이 캠퍼스를 종횡무진 누비던 시절, 그는 대강당 3층 유리창을 깨고 ‘유신철폐’라는 현수막을 내걸다 체포당했다”며 오교수는 그를 소개한다. 오교수는 “나에게 배운 제자는 열정적인 투쟁을 하는데 나는 칠판 앞에서 떠들기만 했다”며, “그때 처음으로 강단에 서서 떠드는게 부끄럽게 느껴졌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놨다. 실천과 괴리된 이론은 쓸모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나를 완전히 깨어나게 했다”며 두번째 제자를 소개한다. 바로 이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는 실천하는 지성으로 확실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연세’와 43년간의 인연을 맺어왔기에 ‘연세’를 향한 그의 애정어린 충고는 남다르다. 오교수는 “연세대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저항하던 주체로서의 사학이었으며, 좌파경제학의 대부인 고(故) 백남운 교수 같은 많은 좌파지식인들이 연구하던 곳이었다”며 ‘연세’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후 사학자본의 논리가 매우 빠르게 사학시스템에 자리잡아 “이로써 진보적 학문토양은 계승되지 못했고, 오늘날은 자본의 논리가 학교를 지배하게 됐다”고 오교수는 설명했다. “대학을 기업경영이라고 말한 전 총장들도 모두 신자유주의의 첨병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오교수는 “이런 체제 아래에서 학생들은 비판의식이 없어졌고, 현실과의 타협을 통한 출세지향적인 인간들이 됐다”며 학문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학교가 점점 황폐화돼가고 있다고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학생들이 스스로 모여서 공부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력이 없다.” 오교수는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며 토론하는 자리가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격증 취득이나, 토익 점수를 위한 학생들만이 도서관을 찾아가는 오늘날의 현실은 학문을 하는 대학다운 모습과 거리가 멀다.

“나의 생물학적 한계는 분명 있지만 변화를 위한 씨앗만은 뿌리고 갈 것이다”고 다짐하는 오세철 교수. 인간을 사랑해 대학을 떠난 따뜻한 사회주의자는 만연하는 신자유주의의 ‘처방전’을 만들어 내놓기 위해 오늘도 분주하게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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