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余華)'

'인간'을 사랑해 '허삼관'을 세상에 내던진 중국의 소설가 위화(余華). 그가 생의 가치에 무감각해진 우리 앞에 섰다. 그의 대표작 『허삼관 매혈기』는 베스트셀러를 차지했고, 이를 연극화한 작품은 지난 6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절박한 이야기 속 곳곳에 웃음을 흠뻑 적셔 놓은 위화의 소설들.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을 노련하게 풀어내는 그의 작품들이 삭막한 현대 공간 속에 무성한 산책로를 이루고 있다.

피와 폭력의 소설세계

"맑고 시원한 울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명쾌한 한 가지 이유로 갓난아기는 사촌 형에게 목이 졸리고 꼬집히며 뺨을 얻어맞는다. 급기야 아기는 팔이 아프다고 그냥 놓아버리는 사촌 형에 의해 마당에 내던져지고, 그의 머리에서 나온 피는 흥건하게 지도를 그린다. 이처럼 20대의 위화는 그의 중편소설 『어떤 현실』에서 피와 폭력, 그리고 죽음을 펼쳐 그린다. 작가가 소설에서 다루는 죽음은 단순히 '죽었다'의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죽어가는가'의 묘사다. 너덜너덜한 살점과 뚝뚝 떨어지는 피의 회화는, 스크린에서 관객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언짢음을 능가한다.


폭력없는 세상을 꿈꾸며

작가가 이렇듯 엽기 호러물에나 등장할법한 불편한 상황들을 글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죽음과 폭력적 상황들을 지적함에 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피와 폭력을 마음껏 뛰놀게 해 독자의 가슴에 강한 충격을 준다. '어떻게 죽어 가는가'의 묘사도 더 큰 충격을 위한 작가의 세심한 장치다.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지?'라고 눈살을 찌푸리던 독자들도 소설을 다 읽은 후 서서히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명분도 없는 전쟁이 난무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폭력적 현실에 대해 각성한다. 많은 사람들의 각성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큰 동력이 되는 것이다.

모든 관심을 '인간'에게 돌리려는 작가의 욕심은 피 냄새와 섞여 독자에게 다가간다. 그 욕심 앞에서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만을 충실하게 따르는 생명없는 노예다. 작가는 독재자가 돼 소설 속 인물들을 마음껏 조종한다.

소설 속 인물의 욕망을 해부하다

작가의 성숙과 성장은 '폭군 위화'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위화는 첫 장편 소설인 『가랑비 속의 외침』을 쓰면서부터 자신의 서술에 반항하는 인물들과 마주한다. '작가는 결코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세계에 함부로 침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위화는 자신의 욕망보다 복귀(『살아간다는 것』의 주인공)나 허삼관(『허삼관 매혈기』의 주인공)의 일상 속 소소한 욕망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허구 속의 인물들도 지니고 있는 그들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작가는 인내있는 경청자가 되는 것이다. 복귀와 허삼관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살아 숨쉬는 중국인'을 그려내고자 했던 작가의 소망을 이루게 한다.

삶 자체가 살아감의 목적

복귀와 허삼관은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로, 어디서나 살고 있을 법한 평범한 중국인이다. 작가는 이들의 욕망과 시대의 흐름을 잘 버무려 '인생'을 논한다. 복귀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차례차례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낸 늙은 농부다. 절망 뒤에 찾아오는 희망은 다가오는 더 큰 절망의 노리개일 뿐이다. 이처럼 견딜 수 없는 아픔에 만신창이가 된 복귀지만, 삶의 치열함만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제 손으로 묻고, 자신의 죽음 앞에 걱정해야 할 사람이 없음을 감사한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유머와 삶의 기구함에 독자는 울다 웃으며, 작가의 입담에 마음을 희롱당한다. 그리고 어찌됐건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인생론에 일말의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범인(凡人)의 매혈인생(賣血人生)

'인물에게 주체적인 생명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작업은 바로 옆동네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허삼관에 이르러 절정이 된다. 허삼관은 장가를 가고, 빼앗긴 살림을 되찾고, 가족들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피를 판다. 허삼관에게 '매혈(賣血)'은 그의 인생의 상징이며 삶의 모든 동력이다. 많은 피를 팔기 위해 물을 배터지게 마시고, 금세 배짱 좋게 탁자를 두드리며 돼지간과 황주를 시켜 먹는 능청스러운 허삼관. 그 앞에서 살며시 이는 미소를 참기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 피를 팔아야만 하는 상황은 매우 비극적이지만, 바보같고 능청스러우며 거들먹거리는 허삼관의 모습에서 웃음아닌 웃음을 짓고마는 것이다. 삶의 기구함은 웃음 앞에 무력하며, 이로써 우리는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살아간다는 것』 중)." 살아감의 기구함과 뼈 속에 사무치는 한을 한바탕 민요의 어우러짐으로 걸쭉하게 뽑아내는 시대의 작가 위화. 삶 자체를 긍정하는 위화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의지는 현대인의 무뎌진 생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온정어린 채찍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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