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기억, 영원한 감정

기억은 닳는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의 세세한 부분을 잊거나 왜곡하곤 한다. 그럼에도 기억의 핵심은 사라지지 않고, 당시의 감정도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에 머무른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흐릿해지는 기억과 또렷이 유지되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 남겨진 자들의 위안거리

 

매일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노인 마조리’. 그녀는 남편 월터와의 사별 후 외로움을 호소한다. 마조리의 딸 테스와 사위 은 마조리의 고독을 덜어주기 위해 인공지능 홀로그램을 집에 들인다. 인공지능의 이름은 월터 프라임’. 마조리의 남편 월터를 복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월터 프라임은 자신의 원본 월터가 살아생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모른다. 이에 마조리의 가족은 자신들이 추억하는 월터의 모습을 월터 프라임에게 들려준다. 이를 학습한 월터 프라임은 생전의 월터처럼 마조리의 곁에 다가와 대화를 나눈다. 덕분에 마조리는 남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모처럼 행복감을 느낀다.

 

▶▶ 월터 프라임(왼쪽)과 나이 든 마조리(오른쪽)가 대화하는 모습
▶▶ 월터 프라임(왼쪽)과 나이 든 마조리(오른쪽)가 대화하는 모습

 

시간이 흘러 마조리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테스는 엄마를 잃은 상실감과 그녀를 잘 보살피지 못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를 지켜보던 테스의 남편 존은 장모를 복원한 인공지능 홀로그램 마조리 프라임을 집에 들인다.

그러나 테스는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는 마조리 프라임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생전의 마조리는 잘 웃지 않았다고 쏘아붙인다. 사실 테스의 어린 시절 오빠가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때부터 마조리는 딸 테스에게 애정을 제대로 쏟아주지 못했다. 평생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살아온 테스에게, 마조리의 따뜻한 웃음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의 따뜻함에 마음을 열고, 숨겨 왔던 상처를 마조리 프라임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 홀로그램 마조리 프라임으로부터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은 테스. 수년 후 그녀도 어머니 마조리를 따라 세상을 떠난다.

장모 마조리와 아내 테스까지 떠나보낸 존.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테스를 복원한 인공지능 홀로그램 테스 프라임까지 집에 들인다. 존은 아내 테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노쇠한 존은 아내 테스를 따라 세상을 떠난다.

영화의 엔딩에는 텅 빈 거실로 인공지능 홀로그램들이 하나둘씩 입장한다. 처음 만들어진 월터 프라임부터 마조리 프라임, 테스 프라임까지. 인공지능 홀로그램들은 마치 자신들이 살아있는 사람인 듯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내 사위 존은 어딨지? 이렇게 다들 모여있는데, 종종 들르면 좋겠군.”
-월터 프라임-

▶▶ 시간이 흘러 인공지능 홀로그램들만 집에 남았다
▶▶ 시간이 흘러 인공지능 홀로그램들만 집에 남았다

 

하지만 이미 사망한 존이 다시 돌아올 수도, 존을 복제한 인공지능 홀로그램 존 프라임이 찾아올 수도 없다. 더는 존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세 인공지능 홀로그램의 모습을 멀리서 비추며 끝난다.

 

원형에서 멀어지는 기억, 메아리치는 감정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전달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형과 왜곡에 주목한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과거를 추억할 때마다 일일이 플래시백** 장면을 넣기보다는 최대한 대화로만 기억을 묘사한다. 이에 영화는 주로 마조리의 집 거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된다. 제한된 공간은 기억이 불완전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정 기억을 플래시백 장면으로 바로 시각화하는 것보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 때 기억의 변형 및 왜곡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원형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야.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기억은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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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기 두렵거나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을 때도, 기억 전달에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서 테스의 죽은 오빠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시된다. 그러나 치매를 앓고 있는 마조리는 끊임없이 나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라고 가족에게 질문한다. 엄마가 죽은 오빠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본 테스는 슬픔에 빠진다. 그러자 테스의 남편 존은 인공지능 홀로그램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의 죽은 아들 이야기를 삼가도록 한다. 이는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지라도,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마조리 프라임과 테스 프라임에게 기억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존과 월터 프라임은 테스의 죽은 오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인공지능 홀로그램 마조리 프라임은 자신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테스 프라임은 죽은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기억의 일부가 잘못 전달되고 잊힐지라도, 기억이 품은 감정은 오래도록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테스는 월터가 마조리에게 청혼할 때의 기억을 월터 프라임에게 주입한다. 이때 테스는 호텔에서 월터가 청혼할 때, 방 안의 TV에서 카사블랑카가 방영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때 TV에서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재생되고 있었다. 테스는 실수로 기억의 일부를 실제와 다르게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학습한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내가 청혼할 때 카사블랑카TV에서 나오고 있었잖아, 안 그래?”라고 말한다.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조리는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며 추억에 잠긴다. 결국 영화는 기억의 불완전함을 다루고 있음에도, 기억에 깃든 감정은 쉽게 휘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청혼할 때 TV에 나오던 영화가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었는지 카사블랑카였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남아있는 그때의 행복감이었다.

 

▶▶ 기억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테스와 존
▶▶ 기억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테스와 존

 

기억은 퇴적층과 같아서, 잊힐지라도 어딘가에는 남아있기 마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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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떠나보내도 감정은 남아있다는 것.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풍화 속에서도 감정만큼은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기술로 기억합니다

 

영화 속 고인을 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다. 지난 2023년 인공지능 기업 딥브레인AI’는 고인이 된 가족의 얼굴과 목소리를 인공지능 기술로 고스란히 구현하는 추모 서비스 '리메모리'를 내놨다. 고인이 생전에 촬영한 인터뷰 영상을 바탕으로 유가족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고인을 되살리는 인공지능 기술은 주로 음성 부문에서 활용되고 있다. 2019년에는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가수 김광석의 목소리로 복원한 보고 싶다노래가 약 170만 조회수를 달성하기도 했다.

지난 2020년 Mnet은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에서 인공지능 기술로 복원한 가수 터틀맨과 김현식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프로그램은 터틀맨이 부른 적 없는 「새로운 시작」을 터틀맨이 실제로 부르는 것처럼 재현했다. 터틀맨의 중후한 목소리뿐 아니라, 터틀맨과 비슷한 체형의 남성 댄서에 터틀맨의 얼굴까지 딥페이크로 합성했다. 프로그램 방영 이후에는 터틀맨이 소속됐던 혼성그룹 ‘거북이’의 전체 음원 평균 스트리밍 건수가 크게 증가했다. AI 음악 플랫폼 ‘지니’의 통계를 보면, 방송 전주 대비 「비행기」의 재생 횟수는 168%, 「빙고」의 재생 횟수는 246% 증가하는 등 거북이의 전반적인 대표곡들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터틀맨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서강대 ‘지능형 음성대화 인터페이스 연구실’ 이정필 선임연구원은 “인공지능 기술로 고인을 복원하는 것은 추모와 추억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며 “완벽한 가상 인간을 만드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더욱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시절의 당신

 

이렇게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추억을 되살릴 때, 고인의 어떤 시절을 복원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에서 마조리는 남편 월터를 40대 시절의 모습으로 되살린다. 반면 딸 테스는 엄마 마조리를 눈을 감기 직전 80대 노년 시절로 복원한다. 이렇게 두 사람이 희망하는 복원 시점이 다른 이유는 복원 목적의 차이에 있다. 마조리는 남편보다 10살 넘게 어렸기 때문에, 남편이 노환으로 죽기 직전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인공지능 홀로그램으로라도 젊게 살기를 원한 것이다. 한편 테스는 치매에 걸린 엄마 마조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노년 시절의 마조리를 복원해 한()을 풀고자 한 것이다.

복원 시점에 대한 고민은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식은 데뷔 초에는 미성과 가성을 구사했으나,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오랜 지병으로 인해 탁성만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김현식을 유작 「내 사랑 내 곁에」 속 거친 목소리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프로그램의 목적은 건강한 시절의 김현식을 되살리는 데 있었기에 탁성을 줄여 복원했다. 기억하는 사람의 희망에 따라 복원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에 이정필 연구원은 “가까운 미래에 복원 시점에 대한 기술적 한계가 자연스럽게 극복될 것”이라며 “딥페이크 악용을 방지할 제도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한다.

 

기억은 차츰 흐릿해지지만 감정은 또렷이 남아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게 한다. 먼 길을 떠난 이들을 추억으로 되살려낼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글 황선우 기자
muna_sudal@yonsei.ac.kr

<사진제공 티빙>

 

* 플래시백: 장면의 순간적인 변화를 연속으로 보여주는 기법. 주로 과거 회상 장면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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