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한 교수(사과대·사회학)
강정한 교수(사과대·사회학)

대부분의 윤리적 행위 원칙은 의무론과 결과론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의무론적 원칙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행위인지를 판단한다. 반면 결과론적 원칙은 행위가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로 행위가 윤리적인지 판단한다. 두 원칙은 윤리성 판단의 언어가 다르며 좀처럼 화해하기 힘들다. 의무론적 원칙의 대표적인 예로는 개인의 ‘자유’를 들 수 있고, 결과론적 원칙의 예로는 ‘공익’을 들 수 있다. 자유가 지나치면 공익을 해치고 공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개인은 억압 당한다. 전 세계는 기나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 시절 이 두 가지 원칙의 충돌을 피부로 경험했으며,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둘 중 무엇을 더 윤리적으로 강조하는지 차이가 있다는 점도 확인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공익 중 무엇을 더 강조하는가? 좀 더 정확히는 자유와 공익 간 타협한 결과로 나타난 시대 윤리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무해’함, 즉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안 주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보다 나에게 무해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편안하고, 나 역시 최소한 세상에 해는 끼치지 말자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극단적으로 대비시켜보자면 동기가 선할지라도 누군가를 돕겠다고 지나치게 의욕을 보이고 간섭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열심히 번 돈으로 진심으로 소비에 집중하는 사람이 더 무해한 사람이다. 

이러한 무해의 원칙은 소극적인 공익 추구라는 결과론의 언어를 띠고 있다. 하지만 결과론적 표현 속에 숨은 내용은 사실 적극적인 자유의 추구다. 무해함의 원칙에 따르면 내 행위가 타인이나 사회에 미칠 영향은 이익의 크기가 아니라 피해 정도로 평가한다. 아무리 공익이 기대되는 행위라도 피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확실히 피해가 없는 행위만 못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해의 원칙은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는데 극도로 민감하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씁쓸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비윤리적 변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후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미덕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태도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지적하는 것을 점점 꺼리고 지적당하는 것도 점점 불쾌해한다. 

분명 우리 사회의 주요 미덕은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누굴 돕겠다고 나서는 것보다 점점 더 어렵고 중요한 미덕이다. 대학에서 나와 멀어지는 세대를 겪으면서 그걸 느끼고, 무해한 사람에게 점점 더 호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연구실 홈페이지에 써 놓은 가치 지향점도 ‘가능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사회혁신’이다. 

나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점점 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에 무해가 중요한 미덕이 되는 건 당연할지 모른다. 어차피 본인이 책임져야 할 일,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함부로 방해하지도 않기. 그러나 모든 윤리적 원칙이 의무론과 결과론의 긴장을 내포하는 만큼 무해의 미덕도 완전하지 못하며, 나름 사회학자로서 우려도 많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삶 속에서 1인 가구가 증가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받지 못하는 사회적 고립이 증가하지 않는지 걱정된다.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거란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확실한 길은 미래 세대를 낳지 않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된다. 무엇보다 나 밖의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극도의 조심이 나 안에 해를 축적하고, 누군가 나의 자유를 침범했을 때 축적된 해가 분노로 폭발하게 되지는 않는지 걱정된다. 무해의 미덕이 또 다른 어떤 미덕으로 보완되어야 할 시점은 아닌지 근심이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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