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현명한 전략, 어리석음

현대 사회는 현명한사람을 바란다. 이러한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백치*은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없이 어리석고 싶은 사람

 

중년 여성 카렌은 아들을 잃고 참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카렌은 가족들이 자신을 위로해 주지 않고 오히려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자 가출해 버린다. 아들의 장례식 전날, 레스토랑에서 카렌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청년 무리를 발견한다. 청년들은 음식을 질질 흘리거나 접시를 집어 던지는 등 레스토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청년들의 기행에 호기심을 느낀 카렌은 그들의 집까지 따라간다.

청년들의 집에 도착한 카렌은 놀랍게도 그들이 백치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얻은 불만을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거나 괴성을 지르는 등의 일탈로 표출하고 있던 것이다. 처음에 카렌은 청년들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렌은 백치 연기가 주는 해방감에 점점 끌린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카렌은 한동안 우울과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을 비롯해 카렌의 가족은 그녀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하기는커녕, 카렌이 아내혹은 엄마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만을 요구했다. 카렌에게는 백치 연기야말로 정상인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다. 카렌은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청년들을 보며 자신의 인격을 지탱할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카렌은 백치 무리에 합류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치 무리는 억압적인 사회를 향해 울분을 표현하겠다는 본래 목적을 잊고, 점차 자극적인 기행을 저지르는 데만 집중한다. 그러자 무리 중 한 청년은 백치 연기가 자유로운 삶을 위한 도전임을 재확인하고자, 각자 집과 직장에서 백치 연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백치 무리 전원이 그의 말에 동의했지만, 대부분 가족과 직장 동료 앞에서 백치 연기에 부끄러움을 느껴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나 카렌만큼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가족 앞에서 백치 연기를 펼친다. 백치 무리의 청년 한 명과 함께 백치 연기를 선보이는 카렌.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입안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내뿜기 시작한다. 그러자 카렌의 남편은 그녀가 아들을 잃어 미쳐버렸다고 조롱하며 그녀의 뺨을 때린다. 하지만 카렌은 꿋꿋이 백치 연기를 마무리한다. 이후 카렌은 한 마디를 뱉으며 청년과 함께 집을 나선다. “이제 충분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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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앞에서의 백치 연기 전에 울먹이는 카렌

 

도그마 95’, 순수함을 향해 달려간 영화 운동

 

영화 백치들의 설정과 연출은 개봉 당시부터 논란을 낳았다. 주제 의식이 반사회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장면을 편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난 199851회 칸 영화제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1999년 덴마크 영화비평가 협회가 주관하는 보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도그마 95(Dogma 95)’라는 영화 운동 속에서 백치 무리의 기행과 파멸을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낸 데 있다.

도그마 95는 영화 백치들을 제작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이 다른 덴마크 영화감독 3명과 함께 선언한 영화 운동이다. 이는 정형화된 장르 및 상업 영화만 추구하는 할리우드에 반기를 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도그마 95소품 세트 특수조명 카메라 필터 후보정 배경음악 등의 영화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극도로 단순하고 사실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도그마 95는 동시대 영화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지향했기 때문에 순결 서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도그마 95는 엄격한 영화 제작이 주는 과도한 제약 때문에, 영화 코시 x 카소를 끝으로 2000년대 중반에 그 명맥이 끊어졌다.

영화 백치들은 도그마 95의 두 번째 작품으로 선언문의 내용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영화는 백치 무리가 연기를 펼치는 동안 익살스럽거나 서글픈 배경음악을 넣지 않는다. 아름답게 화면을 꾸미는 후보정 작업도 없다. 백치 무리의 유치하고 부도덕한 일탈 행위들을 고스란히 포착할 뿐이다.

백치 무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적 기법은 그들의 모순과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백치 무리 중 한 사람인 요세핀의 아버지가 찾아와, 그녀를 집에 데려가겠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사실 요세핀은 지병이 있어 약을 꾸준히 먹어야 했지만, 아버지의 학대에 질려 가출한 것이었다. 요세핀의 아버지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가려 하자, 요세핀은 비명을 지르며 백치 무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백치들은 남의 일이라며 나서기를 꺼린다. 이때 카메라는 백치들이 아버지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요세핀을 지켜보기만 하는 무력함을 담아낸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백치 연기가 정작 실제 상황에서는 탈출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영화 속 간병인이 백치 무리를 발달 장애인 모임으로 착각하고, 다운 증후군 환자들과의 모임을 주선하는 장면이 있다. 배우들은 실제 환자들 앞에서 거짓으로 백치 연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곤란해한다. 이들은 처음엔 백치 연기에 몰입하려 하지만, 점차 죄책감과 부담감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어떤 배우는 연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기까지 한다. 이 장면에는 도그마 95의 창시자인 트리에 감독의 고민이 담겨있다. 과도한 사실성을 추구하는 도그마 95가 자칫 현실 속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트리에 감독은 다음 작품인 어둠 속의 댄서부터 도그마 95를 포기하게 된다. 영화 속 백치의 순박함을 무작정 동경한 청년 무리의 도전이 실패로 끝났듯, 극도로 순수한 영화를 지향한 도그마 95 역시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백치, 정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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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치 무리는 필요에 따라 백치인 척한다.

 

영화 속 백치 연기는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의 '바보 행세(playing dumb)'는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쓰인다. 미국 성인 25% 이상이 바보처럼 굴어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바보 행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인식하거나, 소외감과 낮은 자존감을 경험하고 있을 때 주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낮은 학점을 받은 대학생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보처럼 행세함으로써 가족들이 성적에 대한 질문을 잊게 하거나 말을 꺼내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1].

바보 행세는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는 방법의 하나로 쓰인다. 미국의 대중심리학 매거진 사이컬러지 투데이바보 행세에 숨은 장점(The Hidden Benefits of Playing Dumb)에 따르면, 번아웃 증후군**에 처한 직장인에게 바보 행세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특정 업무를 할 때 일부러 어설픈 척하거나, 그 업무에 관한 지식을 모른 척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직장인은 자신의 업무 통제력을 재확인하고, 업무 스트레스를 줄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나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바보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특히 기혼 남성들은 엄격한 아버지상()이 아니라 친근한 느낌으로 자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일부러 바보처럼 굴기도 한다[2].

이처럼 바보 행세는 정상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유를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영화 백치들에서 카렌이 가족 앞에서 백치 연기에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백치 무리의 청년들은 백치 연기를 놀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카렌은 현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렌의 백치 연기는 자신의 울분을 분출하는 동시에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 음식을 던지며 파티를 즐기는 백치 무리
▶▶ 음식을 던지며 파티를 즐기는 백치 무리

 

영화 백치들의 자극적인 설정과 장면들 속에는 현대 사회의 서글픈 면모가 깔려 있다. 우리는 백치를 비웃는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백치가 돼야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1] Gove, W. R., Hughes, M., & Geerken, M. R. (1980). Playing dumb: A form of impression management with undesirable side effects. Social Psychology Quarterly, 43(1), 89–102.
[2] Fiske, S. T. (2012). Managing Ambivalent Prejudices: Smart-but-Cold and Warm-but-Dumb Stereotypes. 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639(1), 33-48.

 

 

글 황선우 기자
muna_sudal@yonsei.ac.kr

 

* 백치: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 번아웃 증후군: 어떤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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