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숙 교수(문과대 한국학협동과정·한국학)
최기숙 교수(문과대 한국학협동과정·한국학)

 

연구하고 글 쓰는 직업인으로서, 읽기의 윤리를 정해두고 있다. 쓰기에 앞서 많이 읽을 것. 창의성에 대한 몸의 감각을 돌볼 것. 이건 스스로에 대한 강제가 아니라 즐거운 약속이다. 쓰는 과정에서 얻는 행복도 중요하기에 의무에 강박 되기보다 그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독서하면서 밑줄을 긋는 것은 공감의 표현이자 작은 ‘유레카!’의 신호를 몸으로 전하는 행위다. 당연히 여백에 낙서도 한다. 이런 책들은 되팔 수 없다. 책들은 책장에 일정 기간 꽂아두었다가, 정기적으로 정리한다. 공간이 한정적이니 생존을 위해서도 버려야 한다. 책 먼지와 고서(古書) 바이러스 때문에 치료받은 적이 있어서, 독서하는 공간에 환기와 정리는 필수적이다(고서를 영인한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한 장씩 넘기며 보다가 오래된 종이에 사는 바이러스에 손이 감염된 적이 있다. 그렇게 쓴 논문이 게재 불가를 받아서 깊은 상심에 빠졌었다. 지금은 도서관에 클리너가 설치되어서 병원에 안 가도 된다). 널찍한 공간에 장서를 갖춘 유명인의 서재를 봐도 나는 (마치 가수 장기하의 노랫말처럼) 전혀 부럽지가 않다. 원형 디자인으로 유명한 스톡홀름의 시립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던 기억이 있다. 절차를 거치고 들어가 책도 읽고 내 원고도 교정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는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을 찾았다. 고즈넉하고 아담했다. 움베르코 에코는 보르헤스가 쓴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책, 사람, 우주가 무한히 이어지는 상상력을 사랑하지만, 소유가 능사는 아니니 공간의 분수를 지키려 한다.

사람뿐 아니라 책에 대해서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를 감당하며 산다. 일정 분량을 구매하면, 일정 분량과 헤어진다. 『정리의 힘』을 쓴 곤도 마리에 작가가 ‘끌리지 않으면 버린다’고 한 말이 옷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한 번 읽은 책도 일정 기간이 지나, 다시 끌리지 않으면 버린다. 헤르만 헤세는 ‘가치가 없는 건 가급적 장서로 들여놓지 말고 일단 검증된 것은 절대 내버리지 않기!’(『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라고 했지만, 그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정보량이 쏟아지기에, 읽고 버리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소중한 게 무언지 알게 된다. 공간의 지분을 절대적으로 허용하는 ‘나만의 완소’ 시리즈는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이런 감정 경험은 e-book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손으로 꺼내 직접 버린 책들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소임을 다한 것이니, 조용히 안녕을 고한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뭔가를 찾아 서성이는 사람들을 보면 평화롭다. 그들은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거기에 간다. 요즘 나의 화두는 A.I 시대의 감성과 영성이다. 책을 찾아 읽는 행위는 인간됨의 길을 찾는 진실한 추구다.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종종 연구실로 찾아와 사진을 찍자고 청한다. 웃으며 농담하듯, ‘제가 읽은 것처럼 여기서 찍고 싶어요’라 말하며 연구실 책장 앞에 꽃다발을 들고 선다. ‘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한 거란다’,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이 사진에 찍힌다. 여러 국적의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걸 다 모으면 공부를 둘러싼 온갖 사연의 풍랑 속에서도 기어코 전진하는 배가 있고, 그 배를 노 저어간 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확인하는 스토리 라인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삶은 늘 회자정리다. 나무인 듯 깃들어 있던 학생들은 졸업장을 안고 새처럼 떠난다. 책과의 인연에는 기쁨과 행복뿐 아니라 이별과 애도도 포함되기에, 인생의 여정을 닮았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술라』의 결말은 자신을 배신한 친구 술라가 죽은 뒤에 비로소,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이가 바로 그 친구였음을 깨닫는 장면이다. 책을 손에 들고 문득 처음 만난 시간을 상기한다. 슬프지만 젖어 들지 않고, 기쁘지만 머물지 않도록, 새로 페이지를 넘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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