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열 교수(사과대·행정학)
이삼열 교수(사과대·행정학)

 

2024년엔 학교 안팎으로 중요한 선택들이 많이 일어났거나 일어날 예정이다. 먼저 교내에서는 연세구성원의 선택을 바탕으로 이사회에서 새로운 총장을 임명해 지난 2월부터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고 학내의 중요한 보직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임명됐다. 학교 밖으로는 오는 4월에 임기 4년인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진다. 학교 안팎의 인물 선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참여를 강조하며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고 얘기한다. 

과연 선택은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을까? 사회변동을 설명할 때 ‘구조 vs 행위’는 사회과학의 오랜 논쟁거리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자신의 선택 없이 또는 타인의 선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는 나라나 가정 등을 우리가 선택할 수도 없다. 최근 홍콩과기대 김현철 교수는 ‘인생의 성공 8할은 운’이 결정한다는 다소 거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이 이미 주어진 환경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승리의 사례들과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러한 환경 결정론 또는 구조론에 언제든 예외가 있음을 입증한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구조론에 대한 반례라고 할 수 있다. 

평균적으로 보면 앞에서 ‘인생의 성공 8할이 운’이라고 하듯이 예외는 2할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8할에 속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수십 개 나라들이 독립하거나 새로 건국됐으나 대부분 경제발전과 정치 안정에 실패하고 저개발과 정치 불안의 늪에 허우적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신분 상승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도 ‘8할 주장’을 지지한다. 

우리나라는 예외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그동안 쌓인 구조적 요소들이 내적으로 매우 강화돼 있다. 이를 ‘경로의존성’으로도 볼 수 있는데, 수많은 선택들이 오랜 시간 동안 쌓이면서 이러한 구조를 벗어난 선택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비용이 들어가 이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단적으로 자동차 좌측통행과 우측통행, 기차괘도의 광괘, 표준괘, 그리고 협괘의 사례, QWERTY 자판 등은 경로의존성 설명에 자주 거론되는 사례들이다. 

대기업과 제조업 위주의 경제성장, 수출주도 경제, 정부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발전, 높은 대학 진학률, 비교적 안정적인 민주 정치 등은 한국을 상징하는 발전경로의 특성이다. 암기 위주의 초중등교육도 단기간에 일정 수준의 노동력을 대거 공급해야 했던 우리 경제의 제조업 수요가 견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의 학풍, 또는 연세정신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선택들이 낳은 결과물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결정들이 있었는지 어떤 희생과 노력들이 있었는지 파악해야 한다. 진리와 자유의 기독교 정신이 우리 학교의 연구와 교육에 어떠한 기제를 통해 영향을 끼쳤고 졸업생들이 어떠한 삶을 살게 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그동안 성공적이었던 경로적 특성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발전적 특징들은 이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대기업의 지나친 성장은 새로운 기업의 성장을 방해하고, 출연연구소의 지나친 성장은 새로운 시도를 위한 여지를 좁게 만든다. 지나치게 높은 대학 진학률은 노동수요와 노동 공급 간 미스매치를 낳았고, 성공적이었던 초중등교육제도는 저출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모두 저마다 새로운 전략을 얘기하고 문제해결을 얘기한다. 하지만 과학이나 공학과는 다르게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정책의 통한 문제해결’은 환상에 가깝다. 도리어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것이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새로운 문제를 낳기 일쑤다.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아 주요 자리에 오른 이들은 자신이 속한 기관이나 조직의 경로의존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 없이 ‘나를 뽑아주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이들을 불신하는 이유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이들만이 이를 넘어설 가능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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