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당선작]

(연극 제작을 위한) 세미나 

김흥준(정외·18)

 

등장인물 : 레몬, 고래, 기린, 하마

레몬 우리 극은 박수를 자주 칩니다. 박수의 크기는 이 정도이죠.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 금방 제가 박수를 친 것은 이 연극에 연극적인 요소를 삽입하기 위함입니다. 연극 제작을 위한 세미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은 실제 이 연극을 만들기 위해 진행한 세미나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연극이 잘 분간이 안 되는데요. 이건 분명히 연극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 극은 박수를 자주 칩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박수를 칠거고요. 그 박수 소리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레몬 이곳은 극장입니다. 사면이 검은색이며 중앙은 텅 비었으며, 위로는 격자형의 구조물에 수십 개의 조명기가 걸려있는 이곳을 우리는 극장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블랙박스형 극장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극장 이죠. 공간적 제약이 없어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근데 어떨 때는 공간적 제약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제약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바라보는 방향의 좌측에는 초록색 불빛을 내뿜는 비상구가 있습니다.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제가 직접 비상구 앞까지 걸어가 박수를 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걸어가며)

하나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박수를 친다)

 

레몬 좌측 비상구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모두 이 문을 통해서 이 극장에 들어와 지금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오셨을까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극장은 이야기를 하는 곳이잖아요. 근데 사실 저에게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려고 몇 번을 시도해봤어요. 노트북을 켜두고, 한글 파일을 켜둔 채 무엇을 적을까 브레인스토밍을 해봤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미 다 해버렸고,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는 생김새와 겉모습만 있습니다. 저는 기다란 코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은 조금 까무잡잡하고, 원래는 이렇게 까무잡잡하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오존층이 파괴된 나라에서 몇 개월을 살다보니 이렇게 구릿빛으로 익었죠 아, 괄호를 열고 닫는 것도 연극적 요소입니다. 얼굴형은 둔탁한 계란과 비슷하고, 180이 조금 넘는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흰색 면 티와 검정색 면바지, 그리고 흰 양말과 검정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저는 금방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버렸습니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죠?

 

(고래가 반대편 비상구에서 나와 비상구 앞에 선다)

 

고래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 극이 시작한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 번째 박수 소리입니다. 이러다 박수만 치고 극이 끝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분도 계시겠지요? 저는 반대편 비상구에 서 있습니다. 이 극장의 비상구는 총 두 곳입니다. 비상시에는 저를 포함한 공연진들이 여러분들의 신속한 퇴장을 도울 것입니다. 저는 조금은 넓대대한 얼굴에 커다란 눈, 콧볼이 넓은 코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고래입니다. 입고 있는 옷은 저기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는 반대편 비상구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습니다. 말을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이곳에 돌아왔어요?

 

레몬 저는 건너편에 서 있는 저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 사람과 오랫동안 이곳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떠났습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저는 극장을 떠났고, 이야기도 없습니다.

 

고래 그래서 왜 이곳에 돌아왔어요?

 

레몬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겠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고래 너무 멀리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무대에서 만나는 건 어떨까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걸어가며)

하나

다섯

 

저는 무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으로 오시겠어요?

 

레몬 기대는 말아주세요.

 

고래 당연하죠.

 

레몬 가보겠습니다.

 

(걸어가며)

 

하나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레몬과 고래 양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한다)

 

고래 오랜만이에요. 우리 몇 년 만에 만나는 거죠? 2년만인가요?

 

레몬 네, 2년 동안 저 없이도 많은 공연을 올리셨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잘. 제 빈 자리를 느낄 겨를도 없었겠어요.

 

고래 네, 아무래도 그렇죠. 빈자리라고 할 게 있나요?

 

레몬 있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요?

 

고래 당신의 빈자리 때문에 연극이 별 탈 없이 수월하게 진행됐어요.

 

레몬 저 다시 갈래요.

 

고래 잡지 않아요.

 

레몬 잡아야죠 !

 

고래 싫어요.

 

레몬 (돌아오며) 너무해요.

 

고래 다시 왔으니까 연극 얘기부터 할까요?

 

레몬 이렇게 바로요?

 

고래 그럼 다른 할 얘기 있어요?

 

레몬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요즘엔 뭐에 관심이 있어, 돈벌이는 어때 이런 이야기는 하지도 않아요?

 

고래 아까 이야기가 없다고 했잖아요.

 

레몬 듣고 있었네요. 그래요 그럼 연극 이야기부터 합시다.

 

고래 사실 지금 올릴 연극이 없어요.

 

레몬 예전에 만들었던 연극은요? 그거 재연하는 거는 별로에요?

 

고래 연극 <메아리> 를 말하는 거죠?

 

레몬 네.

 

고래 <메아리> 이야기를 하려면 관객들한테 설명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관객들은 그게 뭔지 몰라요.

 

레몬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야 할 거 같아요.

 

고래 그렇게나 거창하게요?

 

레몬 부탁드려요.

 

고래 영상 오퍼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프레젠테이션 작동한다)

 

레몬 살풀이. 타고난 살을 풀기 위하여 하는 굿. 발길 없는 한강 상류의 어느 밤, 세 사람이 살을 풀기 위해 나타난다. 서로를 발견한 셋은 무당을 기다리며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살풀이. 극장을 찾은 당신의 살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공연으로 우리의 살은 풀릴 수 있을까요?[1]

 

고래 이건 시놉시스잖아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요.

 

레몬 이 공연 재연을 할 때 제가 드라마터그를 했는데요. 그때 쓴 글을 공유할래요. 영상 오퍼님, 그 다음 ppt 화면으로 넘어가주시면 됩니다. <메아리>는 지난 여름 제임슨과 낙타, 계란찜, 그리고 서른 명의 공연진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쌓아올린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제가 제임슨이고요. 제임슨 위스키를 좋아하거든요. 두 친구와 제가 함께 공동 창작한 연극입니다. <메아리>가 쓰일 때, 가장 많이 고민되었던 것은 "어떤 이야기가 연극이 되어야 할까"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쌓아온 경험과 역사들을 바탕으로 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은성, 강산, 해수의 이 야기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 여기서 <메아리>는 은성, 강산, 해수란 세 명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죠? 은성은 특정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정체성 앞에 고민합니다. 강산은 폭력의 경험과 연결된 성적 지향과 자기혐오를 겪고요. 해수는 가난의 경험과 동물의 경험을 연결 지어 지구에 얽힌 살()을 고민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지금껏 쉽게 말해지지 않았던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아리>가 다시 찾아오기 까지 필요했던 8개월이란 시간 동안, 우리는 <메아리> 가 다시 이야기 되어야 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차이를 지운 채, 혐오의 말을 쏟아 내는 세력이 부상했고, 3년 만에 열린 퀴어 축제에는 여전히도 미움의 말들이 쏘아다니고, 자신의 안온함을 위해 생존을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없애려 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메아리>는 망가진 세상 속에서도 우리 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지난 8개월의 시간동안 더욱 깊어지고, 더욱 필요해졌습니다. 망가진 세계 속에서도 손을 잡고,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며, 세계를 떠나지 않고, 그럼에도 이어질 내일을 고민하는 우리의 이야기에 부디 함께해주세요. 이 정도면 <메아리> 가 어떤 극인지,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요?

 

고래 상당히 사회 참여적이고 퀴어적인 극이죠.

 

레몬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근데 사회참여적인 극은 뭐고, 퀴어적인 극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고래 그런 이야기는 세미나를 하면서 좀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 해요.

 

레몬 그래서 <메아리>를 재연하는 건 좀 어려운거죠?

 

고래 네, 재연은 물론 3연에 4연까지 했어요. 이제 좀 다른 거를 보여줘야 해 요.

 

레몬 퀴어 말고 페미니즘 말고 사회참여적 말고?

 

고래 그건 세미나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니까요?

 

레몬 쓰고 있는 연극은 있어요?

 

고래 아니요.

 

레몬 그럼 아예 새로 써야 하는거죠?

 

고래 네, 쓰시겠어요?

 

레몬 해봐야죠. 혼자서는 못 써요. 상상력 부족이에요.

 

고래 세미나를 하죠?

 

레몬 그 놈의 세미나. 합시다. 언제부터 할까요?

 

고래 다른 팀원들이 조금 바쁜 시즌이에요. 연말이라서 다들 공연이 많잖아요.

 

레몬 그럼 대면은 조금 어렵겠네요?

 

고래 네, 처음에는 줌으로 하고, 그 다음부턴 대면으로 합시다. 일단 다음 주 월요일 오전 10시로 할까요?

 

레몬 오전 10시에 첫 회의를 잡는 기획 정말 사악하네요.

 

고래 10시에 하자고 해야 11시에는 시작해요.

 

레몬 그래요.

 

(조명은 반 조명 상태로 바뀐다)

 

레몬 자, 이제 이 연극의 1장 같은 것이 끝났습니다. 장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연극은 아닌데, 연습 편의 상 그렇게 나눠놓았어요. 편의 상 나눠놓은 2장이 시작되면 다시 조명이 원 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다시 극으로 들어가겠다는 연극적 신호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장은 팀원들과 하는 첫 줌 회의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인물들이 줌 화면 속에서 등장합니다. 요즘은 메타버스 연극이 대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따라해 봤습니다. 마인 크래프트 맵 안에서 펼쳐지는 연극. 커다란 스크린으로 줌을 접속하고 타 국의 배우와 극장의 배우를 연결한 다음 두 배우가 줌을 통해 이야기하는 연극. 이해할 수 없는 미디어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영상 속 목소리가 어느 순간 극장 내 배우의 목소리와 겹쳐지는 연극. 더 이상 연극만이 현장성의 예술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즘은 ''경계가 대세라고요. 자고로 요즘 연극이라면 연극, 영화, , 영상, 노래 이런 경계를 넘나드는 무언가를 이야기해야하 니, 저희는 화상회의 줌을 활용해보겠습니다.

 

(무대 중앙에 줌 회의 화면이 켜진다. 고래는 오퍼석 옆에 앉아서 줌에 접속하고, 레몬은 무대 뒤 대기실에서 줌에 접속한다. 하마와 기린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서 줌에 접속한다. 무대 중앙 줌 회의 화면에는 레몬, 고래, 하마, 기린이 4분할로 등장한다.)

 

[첫 번째 세미나]

 

고래 제 목소리 잘 들리세요?

 

레몬 네 잘 들리는데요, 조금 하울링이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고래 어떻게 하면 하울링이 안 날까요?

 

레몬 노트북 소리를 꺼보세요.

 

고래 그럼 전 어떻게 들어요?

 

하마 극장 스피커랑 연결되어 있잖아요.

 

고래 맞네요. 이제 괜찮죠?

 

기린 네 잘 들려요.

 

레몬 다들 오랜만이에요,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 근황 토크로 세미나 시작할까요?

 

하마 뭐 특별한 근황이 있을까요. 그냥 공연 두 개 준비 중이고요, 제가 처음으로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서 조금 떨리네요.

 

레몬 우와, 대박이네요. 우리 처음 극회할 때 나중에는 두산아트센터 아르코예술극장 국립극단에서 공연하자고 했는데. 진짜 현실이 되었네요.

 

기린 너무 축하해요. 공연 보러가도 되죠? 예술인 할인 되나?

 

하마 예술인 할인은 되는데 최근 1년 간 상업 작품 2개 이상 참여했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기린 1년에 상업 작품 2개요? 상업 작품 기준이 뭔데요?

 

하마 뭐... 돈 받고 공연하고 그 돈으로 먹고 살면 상업 공연 아닐까요?

 

기린 공연한 돈을 생활비로 쓰기는 하지만, 카페 아르바이트와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가 주 12시간 방과후 학교 연극치료 강사료가 주 수입이면요?

 

고래 연극으로만 먹고 살 수 없는 건 너무 고질적인 문제잖아요. 우리 오늘 조금 늦게 만났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리 새 연극을 만들기로 했어요. 내년 상반기에 상연하는 걸 목표로요.

 

기린 그래요, 바쁜 거 같으니 얼른 본론부터 이야기해요.

 

고래 어떤 연극을 올릴까요? 알다시피 써놓은 대본이 없어서, 공연을 하려면 새 대본을 써야 해요. 대본 창작 단계에서부터 같이 이야기 해보는 거 어때요? 각자 이야기하고픈 주제를 말해볼까요? 너무 질문이 커다란 것 같으면, 그냥 요즘 관심 있는 것, 애정 가는 단어를 말해도 좋아요.

 

레몬 그게 더 추상적이잖아요.

 

고래 그런가요?

 

레몬 전 요즘 자격이란 단어가 끌려요. 어때요, 추상적이죠?

고래 자격이란 단어가 왜요?

 

레몬 그걸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요?

 

고래 어렵나요?

 

레몬 갑자기 말하려니까 어려운데요?

 

하마 우리 이렇게 해요. 왜 연극을 올리는지부터 생각합시다. 난 아직 이 프로덕션 참여한다는 의사 밝힌 적 없어요. 그냥 뭐 하려나 들여다보는 중이죠. 이 연극을 왜 올려야 하는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해서 연극을 만드는지 부터 이야기해요. 거기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전 프로덕션 같이 하기 힘들어요.

 

고래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기린 근데 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요.

 

고래 네?

 

기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고요. 꼭 이야기가 있어야만 연극을 하나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그걸 굳이 무대 위에서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이 무대 말곤 없나요? 무대는 결국 누가 대신 내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고래 다른 존재 이야기를 대신 하고픈 마음은요?

 

기린 제가 그걸 말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마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지 않을까요. 여기 중에 자격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자격이란 단어는 이제부터 쓰지 말기로 하면 어때요? 저는 그 단어가 우리가 만드는 연극에서 말해졌을 때 어떠한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자격 유무만 따지다가 연극이 끝나버린다고요. 그 자격을 누가 주는 건지도 우리는 잘 모르잖아요. 마음에만 품어둡시다.

 

기린 극을 쓰는 동안에 계속 고민하지만 극 전면에 드러내지는 말자 이런 말이죠?

 

하마 맞아요.

 

기린 좋아요. 그렇게 해요.

 

고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도 연극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마 그래서 연극을 왜 하는지 그것부터 고민해야 하는 거죠. 레몬님, 혹시 예전에 썼던 글 공유해줄 수 있나요?

 

레몬 어떤 글 말씀하시는거죠?

 

하마 아마 국립극단의 <로드킬 인 더 씨어터>를 보고나서 쓴 글로 기억해요. 연극의 목적을 애도란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했던...

 

레몬 그걸 기억해요?

 

하마 잘 쓴 것 같다고 동네방네에 자랑하고 공유하고 다녔잖아요.

 

기린 저는 처음 보는 글인데, 혹시 화면 공유 해주시고 천천히 읽어주실 수 있나요?

 

고래 자기가 쓴 글 직접 읽으면 부끄러울 수 있으니 제가 읽을게요.

 

레몬 그래주시면 고맙죠. 화면 공유할게요.

 

고래 연극 예술이란 결국 고통 받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척하지만, 당사자의 목소리에 창작자의 미감을 덧붙여 재현하여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짜내는 것뿐일까란 의문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극을 금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고래 오~ 금할 수 없는 이유~

 

레몬 놀리지 말고 계속 읽어줘요.

 

고래 재현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의 본질은 존재의 가시성이 소멸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연극이 만들어내는 사후적 이미지는 부재한 것을 재현하기에, 필연적으로 온전할 수 없지만,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자들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다시 말해[2]

 

하마 뭘 또 다시 말해요?

 

레몬 아 진짜!

 

하마 알겠어요. 고래 계속해주세요.

 

고래 이미지가 사라져 이 연결이 끊긴다면, 지금 - 여기에 보이지 않음이 그것의 부재를 구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후적이기에 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는 연극이 가진 특권이자 오만이면서, 우리를 지금 - 여기 에서 기억 혹은 타자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지의 완전한 삭제와 음성만 남겨진 무대를 상상함과 동시에 함부로 타자를 재단했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 나를 말할 수 있게 하며, 어쩌면 사건과 나의 연루를 찾게 해줄지도 모른다.

 

고래 그래서 연극은 오만하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타자에게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연결고리로서 연극?

 

레몬 네 그렇게 생각해요.

 

고래 그런데 어떻게 2년 동안 연극을 안 하고 살 수 있어요? 다른 존재랑은 조금도 연결되기 싫었던 2년이었나요?

 

레몬 뭐 연극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나요? 다른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한 2년이었죠. 다른 것을 더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래 그럼 정리하면 연극에 소질이 없어서 극장을 떠난 거네요?

 

레몬 네 맞아요. 전 연극에도 연기에도 극작에도 소질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를 떠났어요. 잘할 수 있는 걸 빨리 찾는 게 낫죠.

 

고래 근데 2년 만에 돌아온 이유는?

 

하마 잘하는 게 없어서!

 

기린 실패했어요?

 

레몬 실패라뇨

 

기린 근데 레몬님 글을 토대로 말해보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의 부족 함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고통이 아예 사라져 없었던 것이 되지 않도록, 그것을 부족하게나마 무대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기억하기 위함인 것인가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연극?

 

하마 애도하는 연극?

 

기린 네. 레몬님도 그거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레몬 맞긴 한데...

 

고래 왜 뜸을 들여요. 미리 준비해두었잖아요. 얼른 그 다음 화면 공유 해주세요.

 

레몬 약간 뜸을 들여야 준비 안 한 것 같잖아요.

 

고래 준비 해와도 버벅거려서 준비 안 한 것 같이 보이니까 괜찮아요.

 

레몬 (새로운 창으로 화면 공유를 하며) 잘 보이시나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읽을게요. 정리하자면 무대라는 곳이 결국 사건과 인물을 사후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곳이라면, 연극은 몸짓과 말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케 하고, 부재한 존재에 대한 애도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하마 다시 말하고 이번에는 또 바꿔서 말해요?

 

레몬 한 번만 더 끼어들면 저 진짜 연극 안 해요?

 

기린 됐네! 그럼 우리 세미나 그만 합시다!

 

레몬 아니 다들 연극 안 할 거예요?

 

하마 농담~

 

기린 나도 농담~ 얼른 계속해요.

 

레몬 애도를 위해서 무엇이 부재한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부재를 구성했던 요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면, 연극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감응할 수 없다는 '겸손함' 이 담긴 지금 - 여기 '극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미지를 마주한 관객은 지금 - 여기에 부재하기에 완전히 알 수 없을 기억과, 말할 수 없고 들리지 않았기에 부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할 수 있다. 사유를 통해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 혹은 존재들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우연히도 극장 속에서 이들과 부딪혔다면, 관객들은 더 이상 목격자가 아니라 사건의 연루자가 될 것이다.[3]

 

고래 그러니까 연극은 애도를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기린 그럼 저 하나 더 궁금한 거. 애도를 하지 않는 연극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건가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무대 위에서 웃고 울고 떠드는 게 좋아서 연극을 하는데요.

 

고래 우리는 무엇을 애도해야 하죠? 그걸 정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이번 연극에선 00을 애도하기로 결정했어요. 이렇게?

 

하마 근데 처음부터 이야기하면 애도가 뭔데요?

 

레몬 이렇게 질문만 던질 거예요?

 

고래 하나하나 답해보세요.

 

하마 우리는 뭘 잃었죠?

 

레몬 잘 모르겠어요. 연극을 할 수 있는 무대?

 

고래 그건 너만 2년 동안 잃은 거고요. 우리는 잃은 적 없어요.

 

기린 돈을 잃었죠. 우리 저번 프로덕션 순 수익이 아까 말했듯 5573560원이고, 13명이 함께한 프로덕션이니, 557만원을 13으로 나누면 대충 428천 원 쯤 나오죠. 두 달 고생해서 연극 올린 대가가 428천원이라고요. 연극 할 시간에 다른 일 했으면 어땠을까요? 지난 5년간 난 끊임없이 돈을 잃어 왔어요. 제가 돈을 잃었다고 하면 돈을 애도해줄 건가요?

 

고래 애도는 대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해 되죠.

 

기린 지금 제 상실이 개인적이라는 말이에요?

 

고래 정치적이진 않죠.

 

기린 왜 정치적이지 않죠? 잃어버린 돈과 빈곤. 지나치게 정치적인데요. 그리고 정치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얘기할 필요 없나요?

 

고래 이쯤에서 그만하죠. 더하면 싸움이 될 거 같아요.

 

기린 이미 싸우고 있거든요? 언제까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게 중요하니까요~ 라는 말로 매듭짓고 끝낼 거예요?

 

고래 빈곤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들이 꼭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매듭지어질까 그래요.

 

하마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건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언젠가부터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죽음은 꼭 나대신 죽었구나 생각이 들어요. 목숨을 잃기 위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동물들. 어디서 읽었는데요. 살처분 되는 순간에서야 가축이 생명으로 보인데요. 생산단위로만 상상되는 동물들이 내뱉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그들이 생명으로 보인데요. 그 글을 쓴 사람은 재생명화란 표현을 쓰더라고요. 다시 생명이 되자마자 죽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매일 같이 그들을 죽이고, 또 그들을 잃고 있어요.[4]

 

기린 제가 저희 동네 유기견 보호 센터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 하는데요. 안락사 예정 목록에 매일 같이 다른 강아지들 사진이 올라와요. 사진 옆에는 안락사까지 남은 시간이 써있죠. 강아지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갑자기 말도 없이, 어쩔 때는 억울하게 떠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죠. 쓸모없는 존재의 죽음이 어서 그런가요? 저도 쓸모가 없는 사람인데요. 당장 조명 행잉도 못해서 셋업 기간에 극장에 있어봤자 저 쓸모도 없잖아요. 다들 전장연 아시죠? 이젠 다 아시겠죠. 전장연의 박경석 활동가가 작년 빈곤 철폐의 날에서 "우리가 쓸모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을 그만의 고유한 말투로 외쳤대요.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경찰의 통제와 진압으로 수 시간 동안 버스에서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어요. 저들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아무 문제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가 쓸모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존재의 죽음이 이렇게 사라져도 되는지 저는 화가 나요.

 

레몬 제가 호주에 살 때, 밤에 길가에 나가보면 한 번씩 죽은 동물이 도로에 쓰러져 있었어요. 하루는 토끼가 죽어 있었고요. 때로는 새와 오리들이었고, 포썸이라 불리는 다람쥐 같은 동물도 죽어 있었어요.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도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져요. 그들을 누가 치우는 건지 항상 궁금했는데, 그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기엔 마음이 힘들었어요. 길을 건너다가 우연히 죽은 것들. 생각하고 예상하지 못하는 죽음은 왜 찾아오는 걸까요. 우연한 죽음에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들이 죽은 도로를 떴어요. 잠에 들었다 다시 아침이 되어 도로에 나가보면 그들의 흔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어요. 분명히 도로에 피가 흥건했는데, 피도 사라져 있더라고요. 누가 그들을 치웠을까요. 죽은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냥 버려졌을까요?

 

고래 그럼 우린 사라지고 죽은 것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연극을 하는 걸까요?

 

레몬 그럴 수 있죠. 무대에는 어떤 존재든 부를 수 있으니까요. 할 이야기가 남은 존재가 있다면 언제나 어떻게든 무대에 오를 수 있어야죠.

 

고래 그럼 우린 그런 존재들의 고통을 무대 위에서 나눠야 하나요?

 

하마 고통을 극장으로 가져오면 다 되는 일이었어요? 아무튼 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가면 다시 현실이잖아요. 같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그게 연민이나 동정이랑 뭐가 달라요?

 

기린 근데 고통을 나누는 연극을 누가 보고 싶어 해요? 안 그래도 살기 팍팍 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연극 보면서까지 고통을 나누고 울고 힘들어야 해요? 연극할 땐 좀 웃어도 되잖아요. 난 웃고 떠들고 싶어요. 극장을 나가면 달라진 것 없이 똑같다고 해도, 난 극장 안에서라도 농담하고 떠들고 실없이 웃어야 살 수 있어요.

 

하마 그죠, 아무튼 연극은 재밌어야죠. 재미없는 연극을 누가 봐요.

 

고래 국립극단이나 두산아트센터,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올리는 연극이라면 재미없어도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을까요? 깊고 대단한 의미가 연극에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재미없어도 꾹 참고 볼지도 몰라요.

 

기린 지금 이 연극이 국립극단이나 두산아트센터,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올려줄 만큼 아주 대단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거예요?

 

고래 아니요, 그건 아니죠.

 

기린 그럼 우리 좀 웃어도 돼요? 우리 웃으면서 연극하면 안 돼요? 웃긴 연극 하면 안 되냐고요. 매일 울고 울고 우는 연극해야해요?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법이 엉엉 우는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레몬 그래요. 우리 웃긴 연극해요. 구구절절 말만 늘어놓는 연극 그만하고요.

 

고래 오늘은 이 정도로 매듭을 지을까요? 다음 세미나는 대면으로 만나서 하는 거 어때요? 서로 얼굴 안 본지도 오래 되었잖아요.

 

기린 그래요. 좋아요.

 

하마 저도요.

 

레몬 그럼 줌은 제가 종료할게요. 다음에 봐요.

 

(오퍼석에 있던 고래, 천천히 걸어 나와 무대 중앙에 선다)

 

고래 잘 보셨나요? 첫 번째 세미나가 끝이 났습니다. 많이 싸우죠? 그것도 진지하게. 얼굴 붉히며 진짜 싸우고 있는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뜬금없이 진지한 소리를 한다고요? 그것도 원래 그렇습니다. 매사에 진지한 사람들이에요. 이 점 인지하시고 두 번째 세미나 함께 보시죠.

 

(무대 암전, 불이 다시 켜지면 극장 바닥에 등장인물 레몬, 고래, 하마, 기린 앉아 있다)

 

[두 번째 세미나]

 

기린 의자도 하나 없이 세미나를 해요?

 

레몬 잠시만요. 대면으로 관객 만나는 거 이번 공연에서 처음이죠. 소개부터 하죠. 그게 우리 규칙이에요.

 

기린 안녕하세요 저는 기린입니다. 지금 무대 중앙에 다른 등장인물과 함께 서 있어요.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고 쌍꺼풀이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는 빗으로 다듬어 가지런히 뒤로 넘겼고, 4:6 정도의 가르마를 타고 있습니다. 얼굴은 조금 허옇고, 코는 왼쪽으로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휘어 있습니다. 얼굴형은 조금 길쭉하고요. 175cm가 조금 넘는 키에 살집이 조금 있는 정말 아주 조금 있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흰색 면 티와 검정색 면바지, 그리고 검정 양말과 흰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레몬 마지막으로 하마님도 부탁드려요

 

하마 안녕하세요, 저는 하마입니다. 이름이 정말 하마는 아니고요. 연극 프로덕션에서 쓰는 별명이 하마에요. 사람들은 저를 하마님- 하마님- 이라고 부르죠. 밤샘 작업을 할 때면 하마같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서 하마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죠. 저는 어깨까지 오는 곱슬머리를 하고 있어요. 눈썹이 조금 진하고요, 눈은 동글동글 커다랗습니다. 코는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작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그 대신 입이 크답니다? 하마니까요. 160이 조금 넘는 키에 적당한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체격을 가지고 있어요. 흰 색 면 티와 회색 바 지, 그리고 흰 양말과 검정 컨버스화를 신고 있습니다.

 

하마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네요.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볼까요?

 

고래 우리 오늘도 늦게 만났는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 볼까요?

 

기린 또요?
고래 혹시 나누고 싶은 근황이 있나요?

 

기린 바로 들어가 봅시다.

 

고래 오늘은 연극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꼭꼭 정해야 해요.

 

하마 그럴 줄 알고 제가 뭘 또 적어왔어요.

 

기린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하네요. 하마도 빔 프로젝터 필요해요?

 

하마 아뇨, 말로 설명할게요. 저는 이번 연극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정하기 위해 제 생각을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정리해보았어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이 야기입니다. , 주거권, 공간, 페미니즘, 빈곤, 동물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어요. 두 번째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하나 뿐입니다. 퀴어!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애도. 기후위기. 빈곤. 이 중에 두 가지 기준에 충족하면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주제인 거 같은데요. 어때요?

 

기린 그래요. 그런데요 궁금해서 그런데요.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 하고 싶은 거 그 기준은 뭐예요?

 

하마 제 개인적인 기준이긴 한데, 저를 기준으로 해서 고민을 해봤죠. 뭘 할 수 있고, 해야 하고, 하고 싶은지.

 

레몬 근데 왜 할 수 있는 이야기엔 퀴어 하나 밖에 없어요? 기후위기, 빈곤, 페미니즘.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이야기에요?

 

하마 그야 저는 퀴어 당사자니까, 퀴어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머지는 그런 확신이 없어서요.

 

기린 기후위기 당사자 아니에요? 빈곤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딨어요? 집은요, 주거권은요. 하마 지금도 청년버팀목전세대출로 7000만원 대출 받아서 다달이 이자 내며 원룸 살잖아요.

 

고래 또 싸우네요?

 

하마 그런 이야기를 지금 왜 해요.

 

기린 미안해요. 그니까 내 말은 우리 자격 따져가며

 

레몬 오오! 그 단어 금지라니까요?

 

기린 아무튼 그렇게 연극 만들지 말자고요.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해야 하는 이야기 같으면 또 해요. 이거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하마 저 그럼 이번에는 퀴어 이야기 안 하고 싶어요. 물론 내 이야기 하자고 연극 시작했지만, 구구절절 내 이야기만 하다 보니까 늘 퀴어! 투쟁! 만 하고 있어요.

 

기린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하마에게. 그러다 보면 딴 얘기를 하려고 해도 결국 그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아요?

 

하마 그렇죠. 다 연결되던데요. 이야기가.

 

기린 그럼 그냥 해요. 안 하려고 애쓰면 이야기가 안 나와요.

 

하마 알겠어요.

 

고래 근데 말씀 중에 미안한데요, 저 세미나 끝나고 하마한테 전세보증금 대출 관련해서 잠시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저 이번에 본가에서 나와 극장 근처에서 혼자 지내려고 하는데 전세로 먼저 알아보려고요.

 

하마 그래요, 그렇게 해요.

 

레몬 근데 드디어 분가해요? 이게 몇 년 만이죠? 매일 극장 작업 끝나고 집가야 한다고 빨간 버스 타러 가는 모습 못 보겠네요.

 

고래 아직 집도 못 구했는데요. 조건들 따지다 보니 마음에 드는 방이 없어요. 마음에 드는 방은 예산 오버고, 예산 안에 드는 방은 별로에요.

 

레몬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기린 여기 부동산이에요?

 

고래 전세보증금 대출 포함해서 1억이요.

 

레몬 낙성대나 대림 쪽으로 가야겠네요.

 

고래 대학로 쪽이나 신촌은 어렵겠죠?

 

레몬 아무래도요?

 

하마 따지고 있는 조건은 뭔데요?

 

고래 극장까지 30분 거리 안에 있으면 좋겠어요. 2호선 라인을 중심으로 영등포나 신길, 아현, 문래, 신도림 쪽도 좋고요. 버스 타고 들어가는 연희, 홍제, 홍은동도 괜찮아요. 햇빛이 잘 드는 방이었으면 좋겠어요. 갑갑한 느낌이 들면 우울해지거든요. 창문 밖으론 녹색이 보였으면 좋겠고,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길 바라요. 체리 몰딩이나 붕 뜨는 장판 마감 같은 건 괜찮아요. 아 근데 벌레는 못 참아요. 저 벌레 못 잡거든요. 돈벌레까지는 괜찮은데 바퀴랑 곱등이는 힘들어요. 인덕션이나 화구는 2개 이상 있었으면 좋겠고요. 요리를 자주 해 먹으니까요? 뭐 이 정도요?

 

하마 그러니까 집을 못 구하죠. 정말 포기 못하는 조건 두어개만 생각해요. 아님 돈을 많이 벌던가요!

 

고래 저도 알거든요? 희망은 있을 수 있잖아요. 뭐 희망하는 것도 안 돼요?

 

하마 제가 또 선 넘었죠?

 

고래 조금요.

 

하마 연극 주제 얘기 하자고 모였는데 제가 또 괜한 소리를 했네요. 미안해요.

 

레몬 근데 기린도 괜찮으면 집 얘기 계속해도 돼요.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기린 그래요? 그럼 더 할래요? 하마는 어때요?

 

하마 저도 괜찮아요. 원래 딴소리 하다가 좋은 주제가 떠오르잖아요.

 

레몬 또 호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정치학 수업이었어요. 자신 이 정당의 대표라 가정하고, 선거에서 시민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하는 정책은 무엇인지 구상해보라는 팀 과제가 있었어요. 한국에서 온 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친구 한 명,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온 호주 친구 두 명, 홍콩 친구 한 명과 같은 팀이었는데, 다들 하나 같이 하우징 정책을 이야기했어요. 당장 한 몸 누울 수 있는 공간의 유무가 가장 중요한 거라고 말했어요. 호주 친구는 호주에서도 하우징 정책이 가장 뜨거운 감자라고 말하고요.

 

고래 그런데 집은 조금 보편적인 이야기 같아요. 치솟는 집값, 멀어지는 내 집 마련의 꿈.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어버린 집.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요? 새롭게 형성되는 동시대 의제에 예민하게 반응하자고 했는데, 집값 이야기는 끝도 없이 들었던 것 같은데.

 

하마 저기요 나 같은 퀴어한테 집이 얼마나 특수하고 개인적인 공간인데요? 내가 일찍부터 내가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장만하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살고 있는 이유가 뭔데요. 혈연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나는 마음 놓고 모텔도 못가요. 애인이랑 모텔 한 번 가려면 꼭 한 명이 먼저 들어가고, 나머지 한 명은 한 삼십분 있다가 들어가야죠. 같이 들어가면 의심하고 눈치 주거든요. 난 샤워기 분리 안 한다고! 그래서 혼자 살 수 있는! 애인이랑 맘껏 뒹굴 수 있는 내 집이 퀴어에겐 특히나 더 필요하다고요. 근데 주택담보대출은 다 신혼부부가 최고야. 진짜 어쩌란거지? 이런 거 모르죠? 난 결혼도 가족도 못 만드는데 집은 만들 수 있어야지!

 

고래 맞네요. 미안해요. 나도 괜한 소리를 했네요.

 

레몬 근데 그러면 집은 세 가지 기준 다 충족하는 거 아니에요?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

 

고래 하고 싶어요?

 

하마 하고 싶죠.

 

기린 나도요

 

레몬 그럼 집에 대해 얘기해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면서, 개인적인 특수성도 지니고 있고, 빈곤, 퀴어 다 담아낼 수 있겠네요.

 

고래 그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다 해요?

 

레몬 그럼 일단 꼭 하고픈 이야기부터 하든가요

 

하마 그럼 이렇게 해요. 각자 살고 싶은 집을 말해봐요. 아까 고래가 말한 것 처럼요.

 

기린 와 이렇게 하면 되겠다. 우리 오늘 극장도 빌렸는데, 여기를 내 집이다~ 생각하고 한 번 집을 만들어봅시다. 극장에다가. 왜요 극장 주간엔 아주 극장을 자기 집 안방처럼 생각하면서 누워 자잖아요? 극장은 집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요? 집의 조건이 뭔데요? 벽에 못 박을 수 있고, 공간분리 잘되고, 안전하고, 벌레 없고, 마음껏 꾸밀 수 있고, 넓은 화장실 있고, 체리 몰딩이 없고 커다란 창문과 채광도 있고, 높은 층고도 있고. 얼마나 좋아!

 

고래 여기다가 어떻게 집을 만들어요. 지금 당장 남은 각목이랑 합판도 없는데

 

기린 우리 창고에 천 쪼가리들 있죠. 암막 커튼 같은 거. 남은 거 있잖아요. 그거 일단 가져와보죠.

 

고래 거기까지 누가 갈건 데요?

 

기린 걸어서 15분 오르막 경사 두 번

 

레몬 제가 갈게요.

 

하마 그래요 다녀와요. 안 말려요.

 

레몬 잡아야죠 !

 

고래 싫어요.

 

레몬 (돌아오며) 너무해요.

 

하마 잔 말 말고 가요.

 

레몬 네.

 

(레몬, 극장 밖으로 나간다)

 

기린 우리 그동안 뭐해요?

 

고래 피곤한데 잠깐 불 끄고 누워 있죠? 춥진 않죠? 추우면 각자 패딩 덮구요.

 

하마 괜찮아요. 우리 집이 여기보다 추워요.

 

고래 그럼 불 끌게요.

 

(암전, 1분 가량 암전된 극장은 조용하다. 레몬이 돌아오며 침묵이 깨진다)

 

레몬 아니 다들 뭐하고 있어요?

 

하마 미안 피곤해서 눈 좀 붙이고 있었어요

 

레몬 이렇게 조명도 다 끄고?

 

기린 왜요 뭐 어때요. 암전. 새로운 장면을 위한 준비 단계. 관객들에게 이제 우리 다른 장면을 보일 겁니다~ 예고하는거. 이게 얼마나 연극적인데.

 

레몬 일단 불을 좀 켜봐요. 15분 걸려서 천 쪼가리 다 가지고 왔건만 누워서 자고 있고.

 

고래 아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잠시만 누가 핸드폰 라이트 좀 켜줘요. 오퍼 석 가서 조명 올리고 올게요.

 

레몬 기다려 봐요.(레몬, 핸드폰 라이트를 켠다. 오퍼석 쪽을 비춘다)

 

레몬 이 정도면 보이죠?

 

고래 잘 보여요 아주 잘


 

(고래, 오퍼석으로 올라가 조명을 올린다)

 

기린 아 눈부셔!

 

레몬 이제 일어나요!

 

하마 귀찮은데


 

레몬 얼른!

 

고래 자자 조금 쉬었으니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기린 이걸로 뭘 하자는 건데요?

 

고래 이렇게 합시다. 각자 천 조각 하나씩 가져요. 크기가 조금씩 다를 순 있는데, 뭐 우리 집들도 다 크기가 제각각이니 오히려 좋죠. 극장 아무데나 깔아 두고, 그걸 집이라고 생각해봐요. 그 천 위 공간이 각자의 집이라면, 그 위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 위에서 각자 무엇을 할 건지 상상해봐요. 몸을 움직이며 할 게 있다면 움직여도 좋고, 여기 소품실에서 쓸 만한 게 있으면 가져와서 놓아도 돼요. 일종의 엑서사이즈 같은거죠.

 

기린 정말 별의 별 엑서사이즈를 다 만드네요? 전 제일 큰 천 할래요.

 

(기린, 가장 먼저 천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극장 한 쪽에 깔아둔다)

 

기린 해가 질 시간이면 노란 햇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방이었으면 좋겠어.

 

(기린이 깔아둔 천에 노란 조명이 켜진다. 기린은 극장 소품실로 들어가 담요 몇 장을 가지고 나온다)

 

기린 노란 햇빛이 들어올 때 즈음 깨끗하게 씻고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을 때가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야.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유튜브도 보고 넷플릭스도 보고 디즈니 플러스도 보고. 아무도 날 찾지마. 여기 안에서 핸드폰 뚫어지게 보다가 졸리면 잠들 거야. 일어나면 8시는 넘어있겠지. 그때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간단히 요리도 해먹고. 얼마나 좋아.

 

(하마, 천 한 장을 들고 다른 한 쪽에 깐다. 극장 소품실로 들어가 커다란 인형을 가지고 나온다)

 

하마 내 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마음 놓고 누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야. 아무도 방해할 사람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여기서 이렇게 같이 누워서 멀뚱멀뚱 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러다가 눈이 아프면 옆 에 누워 있는 애인 얼굴을 빤히 봐. 애인은 곧 잠에 들 것처럼 눈이 자꾸 감겨. 자세히 들어보면 코에서는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 이제 곧 잠에 들거야. 나도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잠에 들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이 얼굴 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걸로 난 충분해. 내 집에는 너만 있으면 돼. 이렇게 평생 같이 있고 싶어. 이 비좁고 후덥지근한 내 방에서.

 

(고래 역시 천을 깔기 시작한다)

 

고래 나는 아까 말했던 거 그대로에요. 절대 포기 못하는 두세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창문 밖 녹색 풍경이에요. (녹색 조명이 고래의 천을 비춘다) 인덕션 화구는 두 개 이상이겠죠? 그게 두 번째 조건이에요. 오늘은 날이 더우니 가스파초 냉 수프를 해먹을 거예요. 내가 스페인에 갔을 때, 그 날은 아주 더웠어요. 일요일이라 그런지 식당들이 다 닫았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골목을 걷다가 문을 연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어요. 메뉴판도 없는 오래되고 낡 은 식당이었는데, 내가 더워하는 걸 본 웨이터가 뭐라 뭐라 스페인어를 내게 해요.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오케이 굿. 예스를 외쳤죠. 몇 분 지났을 까 웨이터가 빠알간 국물이 담긴 그릇과 빵 몇 조각을 가져왔어요. 빵을 찍어 먹으라고 손동작을 보여주더라고요. 저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고 그걸 수프에 푹 적셨죠. 시큼하고, 시원하고, 새콤하고, 상큼하고, 말간 맛이었어요. 은은한 단맛이 끝에서 맴도는데 어느새 땀은 멈추고 긴 숨을 내뱉었죠. 나는 오늘처럼 더운 날 가스파초를 해먹어요. 일단 토마토에 칼집을 내고 살짝 삶아내요. 이러면 껍질이 더 쉽게 벗겨지거든요. 오이랑 파프리카, 양파, 아 그리고 샐러리 까지 큼직 큼직하게 썰어서 껍질을 벗긴 토마토와 함께 갈아줘요. 몇 시간 정 도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다음, 그릇에 담아 올리브유 살짝, 레몬즙도 살짝, 후추를 조금 뿌려요. 식힐 동안 사온 바게트를 대충 썰어서 전자레인지에 한 번 돌려주고, 찍어 먹으면. 이게 나한테는 행복이에요.

 

레몬 이제 내 차례네요. 남은 천도 딱 하나 밖에 없고.(마지막으로 레몬 역시 천을 극장 바닥에 깐다) 다들 각자 집에서 행복해지는 방법 하나씩은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나는 몰라요. 집이란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 집은 좁고, 냄새 나고, 더워요. 요리를 하기엔 턱 없이 작고, 그렇다고 배달을 시키기엔 배달비가 너무 비싸요. 오늘도 즉석밥을 데워야 할까요. 제 방은 애매한 정사각형이에요. 옆으로 두 번 정도 구르면 벽에 부딪히게 되는.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두 번 구르면 내 집을 다 둘러볼 수 있어요. 공부를 좀 하고 싶어서 책상에 앉으려면 바닥에 깔아둔 매트리스를 반으로 접어야 해요. 안 그러면 의자를 뺄 수가 없거든요. 이 방에 2시간 이상 있으면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에요. 얼른 나가야 겠어요. 나는 그래서 보통 밤 늦게 집에 들어와요. 술도 많이 먹고 들어와요. 집에서는 바로 골아 떨어질 수 있게. 이게 지금 내 집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집에서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레몬, 고래, 하마, 기린은 각자 깔아둔 천 위에서 각자 설명한 행동들을 오래 이어간다. 작은 천 위가 정말로 각자의 집인 것처럼. 극장 문을 열고 극장 관리원이 들어온다)

 

관리원 저기요, 이제 극장 문 닫아야 하거든요. 오늘 대관 10시까지 하셨죠? 지금 1015분 전이니까, 슬슬 정리하시고 나와 주세요. 나올 때 조명이랑 음향 장비 꼭 원상태로 복귀시켜 주시고요. 꺼내 쓰신 소품 있으면 정리 부탁드리고요. 제가 한 번 더 확인할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극장 정면 측면 오 퍼석 사진 찍어두세요.

 

고래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우리 얼른 정리합시다.

 

하마 그럼 세미나는 어쩌죠? 우리 진짜 이번 연극 집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오늘 정한건가요?

 

기린 엑서사이즈 달랑 한 번 하고요?

 

레몬 그럼 우리 세미나 딱 한 번만 더합시다. 다음 주 중으로 극장 대관 한 번 더 할게요.

 

고래 그래요, 좋아요. 일단 정리부터 합시다.

 

(레몬, 고래, 하마, 기린 꺼내온 소품을 소품실에 다시 넣어두고, 천을 모두 모은다. 조명기를 끄고, 핸드폰 라이트를 켠다)

 

레몬 이 천들은 어떡할까요? 다시 우리 창고에 갖다 두어요?

 

고래 일단 가지고 나갑시다. 각자 집에 가져가서 혼자서 엑서사이즈 해봐도 좋잖아요.

 

레몬 그래요.

 

(레몬, 고래, 하마, 기린 핸드폰 라이트 불빛에 의지하며 극장 밖으로 나가며 대화한다)

 

기린 근데 이 극장 되게 좋다. 조명 음향 콘솔도 다 새 거고, LED 조명도 이 번에 다 장만했나 봐요. 지하철역이랑 위치도 가깝고, 엘리베이터랑 경사로도 있어서 접근성도 좋고. 우리 여기서 공연하게 되는 거예요?

 

하마 여기 공연 계약 했어요?

 

고래 아직요. 그리고 여기 비싸요. 하루 쓰는데 45. 주말은 55. 2주 이상 대관 하면 좀 할인 되는데, 일단 지원 사업부터 알아봐야 해요.

 

레몬 와 진짜 비싸네요? 지원 사업 됐으면 좋겠다. 우리가 안 되면 도대체 누가 되는거야?

 

고래 우리보다 똑똑하고 잘하고 독창적인 팀들이요?

 

레몬 우리는요?

 

기린 아무래도 부족하긴 하죠. 근데 오늘 다들 바빠요? 바로 다음 일정 있어요?

 

레몬 맥주 정말 딱 한 잔만 하고 갈까요?

 

고래 이 시간에 세미나를 더 해야 지원사업 받을걸요?

 

레몬 놀아줘야 일할 수 있는 거 몰라요?

 

하마 진짜 한 잔만 마시고 갈 거예요 전. 내일 아침 일찍 극장 출근이란 말이에요.

 

고래 나도요.

 

기린 좋아요. 그렇게 해요.

 

(레몬, 고래, 하마, 기린 극장 밖으로 나가고 극장은 암전 상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몬이 다시 들어와 무대 중앙에 서서 박수를 친다)

 

레몬 저는 레몬입니다. 우리 극은 박수를 자주 칩니다. 박수의 크기는 이 정도 이죠.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 금방 제가 박수를 친 것은 이 연 극에 연극적인 요소를 삽입하기 위함입니다. 방금까지는 연극 제작을 위한 세미나를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했는데요. 이제부터는 그 세미나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의 한 장면을 잠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이건 연극이니까 박수를 치겠습니다.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이 박수 소리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대 중앙에 있습니다. 이곳은 극장입니다. 사면이 검은색이며 중앙은 텅 비었으며, 위로는 격자형의 구조물에 수십 개의 조명기가 걸려있는 이곳을 우리는 극장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말 하면 블랙박스형 극장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극장이죠. 공간적 제 약이 없어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블랙박스형 극장에서 저는 오늘 집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높은 층고와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이곳이 집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마침 여기에는 무대 설치를 위한 각목과 합판, 전동드라이버와 나사도 있으니 무엇이든 지을 수 있을 거예요.

 

(고래도 무대로 나와 레몬 옆에 선다)

 

고래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 저는 고래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를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상상해보겠습니다. 저에게는 보따리라고 불리는 천 한 장이 있습니다. 가로로 5m, 세로로 5m 인 이 천의 넓이는 25 제곱미터입니다. 국토교통부에서 발표한 1인 가구 최저주거기준 면적이 14 제곱미터, 4.2 평이니, 최저 기준은 충족하네요. 근데 이 기준 만든 지 10년도 지났대요. 아니 저희가 하는 아마추어 연극도 재연을 할 때마다 당시 상황에 맞게 대사와 무대를 조금씩 바꾸는데, 법 만드는 높으신 분들이 연극을 만들면 시대에 뒤떨어진 연극이라고 잔뜩 욕을 먹겠어요. 아무튼 다시 최저 주거 기준 으로 돌아가면 일, 영구건물로서 구조강도가 확보되고, 주요 구조부의 재질은 내열·내화·방열 및 방습에 양호한 재질이어야 한다. , 적절한 방음·환기·채광 및 난방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 소음·진동·악취 및 대기오염 등 환경요소가 법정기준에 적합하여야 한다. , 해일·홍수·산사태 및 절벽의 붕괴 등 자연재해로 인한 위험이 현저한 지역에 위치하여서는 아니 된다. , 안전한 전기시설과 화재 발생 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구조와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하수도 시설과 욕실 및 화장실도 갖추어야 합니다. 이곳 극장이 해당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으니 이곳에 보자기를 깔아두고 제 집을 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몬님, 도와주시겠어요?[5]

 

 

(레몬과 고래, 양쪽에서 보자기를 잡고 무대 중앙에 펼친다)

 

고래 노란 햇빛이 들어올 때 즈음 깨끗하게 씻고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을 때가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이 집은 그런 시간을 제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일단 이불이 있어야겠어요. 잠시만요, 가지고 올게요.

 

(무대 밖 기린, 이불을 들고 등장한다)

 

하마 거기 그대로 계세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하마입니다. 저는 지금 무대 밖 소품실에서 커다란 이불 하나를 가지고 무대 중앙으로 가고 있어요.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무대 중앙, 그니까 보따리 위에 도착했습니다. 고래님, 이 정도 사이즈면 괜찮겠죠?

 

고래 아주 좋아요. 그것도 흰 이불이네요. 갓 빨아 햇빛에 말린 것처럼 바삭거리는. 얼른 이곳에 파자마 잠옷만 입은 채 눕고 싶어요. 그럼 저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고래, 무대 밖으로 나간다)

 

하마 이곳이 제 방이라면 저는 제가 좋아하는 포스터와 사진들을 붙여놓을래요. 근데 이곳은 벽이 없으니, 보따리 바로 옆이 극장 바닥이 벽이라고 생각하고 포스터를 붙여볼게요. 이 사진은 제가 스페인 세비야에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에요. 사람과 강아지가 똑같은 자세로 담벼락에 앉아있고, 그 뒤로는 초록의 나무가 커다랗게 서있죠. 이건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방에 붙여두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도 한 곳에 붙여둘래요. 이쁘죠. 티모시도 이쁘고, 제 방도 이쁘고.

 

(고래,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등장한다)

 

고래 어때요. 제 잠옷?

 

하마 이 집 안에서 그 잠옷 빼고 다 괜찮은 것 같아요.

 

고래 이 잠옷은 내 집의 일부예요.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 또 어떻게 우리 집을 꾸며볼까요?

 

레몬 기다란 햇빛이 필요해요. 햇빛이 없으면 집이 답답하더라고요. 커다란 창문을 내고, 햇빛을 데려옵시다.

 

하마 창문은 어떻게 만들죠? 각목이랑 합판 가지고 와요?

 

고래 여기 극장이잖아요. 만들 필요 없어요. 기린님, 조명 부탁드려요.

 

(기린, 조명 오퍼실에서 조명을 조작하는 척하고, 기다란 노란 햇빛이 보자기 위로 떨어진다)

 

하마 저는 제 집이 생기면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어요. 친구들도 애인도 초대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집이었으면 좋겠어요. 25 제곱미터면 그리 넓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초대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가지와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서, 양파와 파를 잘게 썰어 만든 간장 소스를 뿌려 만든 요리와 단 맛은 약 한 비건 와인 한 잔을 대접할래요.

 

레몬 누가 방금 하마가 말한 요리랑 와인 만들어 올래요?

 

고래 지금요?

 

레몬 그럼요. 하마가 꿈꾸는 집을 말한 건데 지금 당장 만들어 와야죠.

 

고래 지금 어떻게 만들어요? 재료도 없는데.

 

레몬 이거 연극이잖아요. 연극적으로는 뭐든지 가능해요. 기린, 얼른 가지고 와요

 

기린 (큰 목소리로) 제가요?

 

레몬 그 옆에 요리 한 그릇과 와인 한 병, 플라스틱 와인 잔 두 개 소품으로 있죠? 모르는 척 그만하고 가지고 와요.

 

기린 연극 참 뭐 같이 하네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분명 연극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기린이고요! 지금 하마가 말한 두부와 가지로 만든 요리와 와인 한 병, 플라스틱 와인 잔 두 개를 쟁반에 들고 무대 중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손이 없어서 박수를 칠 수 없지만, 저기 무대 중앙에 있는 집에 도착하면 이 쟁반을 내려두고, 도착했다는 신호로 박수를 치겠습니다. 이제 도착했습니다. 괄호 열고 박수를 친다 괄호 닫고. .

 

하마 먹읍시다! 맛있게 먹어야 제가 꿈꾸는 집이에요. 맛이 없어도 먹어요.

 

레몬 식었어요.

 

기린 (작은 목소리로) 식어도 맛있는 척 먹어요!

 

레몬 이제 또 뭐가 필요할까요?

 

고래 없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기린 바퀴벌레?

 

레몬 체리몰딩!

 

하마 곰팡이?

 

고래 그거만 없으면 될까요?

 

기린 전월세 계약 갱신할 때마다 오른 집값 반영하는 집주인?

 

하마 이 코딱지만한 집도 투자 수단으로 생각하는 투기꾼?

 

레몬 부동산 투기 부추기는 정부?

 

고래 그죠. 그런 게 없어야죠. 근데 우리 이렇게 말하면 너무 사회비판적인 연극이 되어버리는 거 아니에요?

 

레몬 우리 사회 비판 연극 아니었어요?

 

하마 그렇게 요약해버리지 말라는 거죠.

 

기린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 거예요? 사회비판연극이든 코미디 연극이든 연극인데?

 

레몬 집이라고 생각해요 집.

 

하마 근데 우리 이렇게 같이 살면 정말 좋겠어요. 우리 집처럼

 

고래 정말요? 극장에서 지지고 볶고, 집에서도 얼굴 보며 살고 싶어요?

 

기린 그러고 넷이 살긴 여긴 너무 좁아요. 네 명이 살기 위한 최저주거면적은 43 제곱미터라고요.

 

하마 그런 건 왜 외우고 다녀요? 기린 웃겨서 기억하고 있어요.

 

하마 뭐가요?

 

기린 가구 구성별 최소 주거면적 및 용도별 방의 개수라는 국토부의 표에 적혀있는데요. 거기에 표준가구 구성이라는 게 있거든요? 4인 가구면 표준가구 구성이 부부 둘 자녀 둘이래요. 심지어 자녀의 표준 나이도 정해져 있어요. 8 세 이상. 남자 아이 하나 여자 아이 하나.[6]

 

하마 지랄.

 

기린 그죠. 웃기죠. 그럼 우리 넷이 같이 살면 비정상이야?
고래 근데 우리 연극 끝나면 이거 다 철수해야 하잖아요. 아쉽겠죠?

 

레몬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갑자기?

 

고래 그니까 아무리 여기가 우리 집 같아도, 이건 분명 연극이고 여기는 연극을 위해 만든 세트이고, 그러니까 연극은 가상이니까. 연극이 끝나면 이건 다 철수되고, 우리는 다 코딱지만하고 냄새나는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겠죠?

 

하마 그런 얘기하면 저 연극하기 싫어져요.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거잖아요.

 

고래 2시간 동안 실제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겠죠?

 

하마 그럼 우리 왜 이러고 앉아 있어요. 당장 밖에 나가서 구호 한 번 더 외 치죠?

 

기린 이봐요. 같이 살긴 뭘 같이 살아. 5분도 안 되어서 싸우는데.

 

레몬 보자기에 전부 다 담고 나갑시다. 나갈 때 되면.

 

고래 그건 당연하죠. 소품은 다 챙겨서 나가야하니까요.

 

레몬 그렇기도 하고, 뭐라도 들고 나가자고요. 뭐라도.

 

기린 지금 정리할까요?

 

하마 아직 연극 중이에요.

 

기린 그럼 조금 있다?

 

하마 네 일단 우리 조금 더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읍시다.

 

레몬, 고래, 하마, 기린은 나란히 누워 극장 천장을 바라본다. 길고 노란 조명 이 보자기 위로 드리워진다. 길고 노란 조명을 제외하고 다른 조명들은 조금씩 사라진다. 다른 조명들이 모두 사라지자, 길고 노란 조명도 차차 사라진다. 극장이 아주 어두워지면, 다시 불이 켜지면 누워 있던 레몬, 고래, 하마, 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자기를 정리하고, 모든 소품을 든 채로 극장 밖으로 나간다. . 커튼콜.

 

 

[1]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 극회 토굴, <술래> 의 시놉시스.
[2] 한송희, 이하림. 2021. “재현 불/가능성과 타자 윤리: 조르조 아감벤과 아즈마 히      로키의 논의를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29(1): 7-38.
[3] 김홍중, 2016,『사회학적 파상력』, 서울 : 문학동네.
[4] 주윤정(Joo, Yunjeong). 2020. “상품에서 생명으로 : 가축 살처분 어셈블리지와        인간-동물 관계” 농촌사회 30(2): 273-307. 
[5] 국토교통부, 최저주거기준 행정규칙, 2011.
[6]  위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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