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대표를 만나다

박김영희(62)씨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에서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이동권 투쟁 현장 일선에서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시민들을 만난다. 어릴 때부터 말하고 쓰기를 좋아했던 그의 삶에는 투쟁이 필연적으로 스며들었다. “늘 앞장서서 마이크를 잡았어요. 찍힌 사진들을 보면, 나는 항상 말하기 바쁘더라고요.” 6월의 첫날, 혜화에서 그의 세계를 마주했다. 2시간 가량의 시간 동안 엿본 그의 세상은 열의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36살에 ‘운동’을 시작하기까지

 

그가 ‘장애 운동’을 만난 건 36살이 되던 해였다. 대학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던 그에게 운동은 멀게 느껴졌다. 그 무렵 드라마, 영화를 통해 접한 운동은 철학과 학문에 밝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년 시절 그는 동생들의 학교 숙제를 대신 해 주곤 했다. 소아마비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그가 학교를 배우고,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이었다. 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그도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더이상 손에 쥘 숙제 더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동네 꼬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선생님이 되어보기도 했고, 방송국에 글을 쓰고 수많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20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의 삶에 운동이 나타난 건, 다소 우연이었다. 친구의 제안으로 장애여성의 피켓 시위를 기록한 전시회를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그는 운동과 ‘장애여성’을 처음 마주했다. “그전까지 ‘장애여성’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나는 무성적 존재였죠. 월경을 처음 했을 때 누군가 ‘너한테 필요 없는 건데’라고 말하더라고요. 나는 분명 여성인데, 여성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어요. 내 몸은 재생산할 수 없는 몸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불안하고 비정상적인 생명을 탄생시키는 몸이라 낙인찍혔죠. 장애여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내가 겪은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됐어요. 나의 차별은 ‘언어화’되자 선명해졌죠. 나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언어로 엮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46살에 만난 ‘정치’

 

▶▶ 정치권에서 활동할 당시, 유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다.
▶▶ 정치권에서 활동할 당시, 유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다.

 

그는 여러 단체에서 대표직을 맡았다. 처음엔 대표라는 직함을 싫어했다. “막중한 책임감, 그리고 권위 같은 것들이 연상됐거든요. 나는 그런 것보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요. 단체에서도 회원 관리하는 걸 좋아했죠. 모든 사람은 고유해요. 고유함에서 발휘되는 사람들의 역량을 알아요.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랑해요. 돌이켜보니 이게 큰 도움이 됐어요. 운동에서 ‘사람’이 참 중요하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의 목소리가 되죠. 사람들을 현장으로 많이 불러 모을 수 있었어요.”

그러다 마흔여섯이 됐을 때, 그는 정치를 만났다. 장애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이동권 투쟁을 이어가던 그에게 급작스럽고, 원치 않던 만남이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대부분 국회의 문턱에서 좌절됐어요. 우리에게는 법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참 많았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정작 정치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해요.” 그 무렵 민주노동당에서 비례대표 1번을 장애여성으로 할당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등을 맡은 경험이 있던 그가 추천됐다. “그런데 정치에도 지연, 학연 같은 ‘관계적 자원’이 참 중요하더라고요. 나는 그게 참 부족했어요. 처음 몸 담았던 민주노동당이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며 진보신당으로 옮겨갔어요. 그곳에서 총선을 치뤘지만 0.3%의 표차이로 국회의원이 되진 못했죠.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서 나의 운동을 이어갔어요.” 

정치권은 그가 처음으로 오롯이 경험한 비장애인의 세상이었다. “선거유세 하면서 명함을 나눠주잖아요. 전동휠체어를 탄 내겐 너무 어려웠어요. 유세하러 가는 것도 쉽지 않았죠. 당시에 장애인 콜택시는커녕, 저상버스도 없었어요. 리프트에 매달려 지하철을 타고 다녔어요. 이동권 투쟁에 더 열렬해진 이유인 것 같아요.”

 

20년째,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지하철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꾸준히, 그리고 지난한 싸움을 이어왔죠. 2001년에 시작한 투쟁이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그럼에도 현실은 여전히 참혹하다. “어제는 전국 순회 이동권 투쟁으로, 옥천에 다녀왔어요. 옥천에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기차는 무궁화호뿐인데, 하루에 총 11대래요. 그 중 장애인이 탑승할 수 있는 기차는 4대 뿐이고요. 그러다 보니 한 번 서울에 다녀오려면 새벽에 나와 밤늦게 돌아가거나, 서울에서 하룻밤 묵어야 해요. 저상버스는 말할 것도 없어요. 옥천에 있는 버스 27대 중 저상버스는 딱 한 대래요. 사실상 탈 수 있는 버스가 없는 셈이죠.”

“이동권은 우리 몸의 혈관과 다름없어요. 혈액이 순환되려면 혈관이 있어야 하죠. 이동권 없이는 학교도, 직장도 갈 수 없고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어요. 이동권 없는 삶은 고립된 생이에요.”

지하철 바닥에 눕고, 버스에 몸을 묶는다. 그렇게 무수한 지하철과 버스를 멈춰 세우고 시민들의 시간을 방해했다. “우리의 운동은 격해요. 끌려 나오지 않기 위해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구치소에 가기도 하죠. 사람들은 우리의 방식을 비난해요.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는다고요. 그동안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수없이 국회를 가고, 대통령을 만났죠. 그런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직장이 없는 우리는 하다못해 파업도 할 수 없어요. 가진 게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몸을 묶는 것이에요.”

“우리는 시민의 힘을 믿어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지하철에선 가장 많은 시민을 만날 수 있어요. 우리는 그들의 삶에 불편을 끼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말을 건네요. 그들의 발걸음을 그렇게라도 멈춰 세우지 않으면, 우리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가닿지 못해요. 우리가 그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는 이동권이 ‘장애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임을 수차례 강조했다. 우리는 한때 청년의 몸을 가지지만, 그 몸은 금세 늙고 병든다. “젊은 몸은 영원하지 않죠. 그렇지만, 편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면 늙어도 고립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동권은 만남이고, 욕구고,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기본이에요. 어느 날 문득 단절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요.”

지난 2021년 12월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기 시작한 이들은 2022년 47차례, 2023년에는 혜화역과 국회의사당역 등지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회사로 향하는 빠른 발걸음을 저지하고. 찡그린 얼굴을 마주해요.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에 시민들이 답을 할 차례예요.”

그는 20년이 넘는 시간을 투쟁으로 물들였다. “우리의 투쟁은 무척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헌신을 요구해요. 투쟁으로 가득 찬 나의 삶은 행복했지만 그만큼 외로웠어요. 저항하기를 선택한 순간, 필연적으로 뒤따른 것이었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지하철에서 욕하는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는 동료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날이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요. 그럼에도 다음 날, 다시 승강장에 서고, 치열하게 싸워요.”

20년 넘게 운동과 함께한 삶을 살아온 그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한다. “나의 몸에도 노화가 찾아오며 할 수 있는 게 더 제한되고 있어요. 점점 더 남의 손이 필요해지죠. 그런 내 몸을 솔직하게 마주해요. 글도 쓰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웃음).”

 

 

글 김혜진 기자
socio_queen@yonsei.ac.kr

<사진제공 박김영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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