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인 교수(우리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국제정치/한국외교)
김영인 교수(우리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국제정치/한국외교)

캠퍼스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캠퍼스를 수놓았다. 하얀 목련과 매화, 노란 개나리와 산수유, 분홍 진달래와 벚꽃이 연둣빛 잎과 어우러져 반가운 봄을 알리고 있다. 캠퍼스를 거닐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싱그러움과 맑은 향기에 흠뻑 취하기도 하고, 어찌 그 춥디 추운 겨울을 버텨냈는가 괜히 대견스럽기도 하다. 이 꽃들이 세상에 기쁨과 쓰임이 되기 이전엔 분명 인고의 세월이 있었으리라! 이것을 깨닫는 순간 꽃의 위대함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 송이의 꽃이 피는 지난한 과정은 나에게 대한민국 외교의 성장 과정을 연상시킨다.

한국은 21세기 대표적인 중견국(middle power)으로 성장했다. 2023년 기준으로 글로벌파이어파워(GFP: Global firepower)에서 집계한 세계 군사력 평가지수에서 한국은 6위에 올랐고, 세계은행에서는 최근 한국의 경제력을 세계 10위 내외로 집계하여 한국을 세계 경제 강국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 이상, 인구 5천만 명이 넘는 ‘30-50’ 클럽에 세계 7번째로 가입하여 선진국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갖추었다.

오늘날 한국의 상승한 국제적 위상은 비단 물질적 차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 간의 관계를 다루거나 국가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시행하는 대외적 행위(behavior) 즉, 외교(diplomacy) 분야에서 더욱 드라마틱한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독특한 나라다. 한국은 2010년 1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산하기관인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여 수원국(受援國)에서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하는 공여국(供與國)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이러한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 사례가 유일하다. 그리고 2021년 7월에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회원국 만장일치’ 합의로 한국을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설립된 1964년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전환된 국가 사례 또한 한국뿐이다.

현재 한국은 높아진 국격에 부응하여 국제무대에서 다자외교 리더십을 실천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2021년 12월 ‘서울 유엔 평화유지 장관회의’를 개최하여 국제안보 다자회의에서 유엔 회원국들의 평화 의지와 군사적 역량을 결집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선보였다. 그리고 2022-2024년 유엔 정규예산과 평화유지활동(PKO) 예산 분담률을 세계 9위 수준으로 책정하여 분쟁예방 및 평화구축에 일조하는 핵심 기여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밖에도, 한국은 주요 선진 7개국 모임인 ‘G7(Group of Seven) 정상회의’에 연이어 초청을 받으며 신흥 경제대국으로 세계 리더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물론 한국외교가 잘 하고 있다고 칭찬만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현실적으로 부족하거나 한계로 지적되는 부분도 여전히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함, 북한 인권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부끄러움, 국민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대일(對日) 협상에서의 무모함 등을 거론할 수 있다. 한국외교는 희한하게 우리가 터전을 잡은 동북아 지역에만 오면 눈치보게 되거나, 움츠리거나 때론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국외교의 행동반경을 한반도 주변으로 한정하는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외교의 성과에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한국외교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1907년 6월 고종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특사 일행은 강대국들의 노골적인 거부로 회의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한 채,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국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자주권을 갖지 못한 나라의 대표로 비통함이 컸던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이국에서 안타깝게 순국했다. 이 일로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가 하면, 1910년에는 끝내 한일병합 조약을 맺어 우리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점령하에 어둠의 시기를 35년 동안 버텨야 했다. 그야말로 100년 전, 한반도엔 우리의 나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은 태생적으로 한반도 내 남북한 대립 구도라는 분단국가의 운명을 안고 탄생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국가의 계속성을 보장받기 위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는 한편, 6·25 전쟁 직후에는 미국과 비대칭 동맹을 맺어 국가 자주성이 제약되는 불평등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국제무대에서 북한과 치열한 체제경쟁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유엔은 진영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냉전 기간 내내 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옵서버 회원국 자격으로 참여한 유엔총회에서 회원국의 발언을 경청해야만 했던, 인정받지 못한 국가로서의 서러움을 견뎌야 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여건하에서, 한국은 체념하고 포기하기보다는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쓰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행동했다. 한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이 흔들리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기치로 내세워 국가 경제발전에 주력하였고, 1980년대부터는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문을 두드려, 주도적으로 외교적 성과를 창출하여 나갔다. 대표적으로 한국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동서 간 화합과 세계평화에 기여했으며, 냉전구조 해체 이전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선제적으로 정상화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성과들은 1990년대부터 한국외교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꽃을 피우게 한 원동력이 됐음에 틀림없다. 한국외교는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는 시행착오 과정에서 성장하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한국외교로부터 배워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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