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숙 교수(우리대학교 국학연구원·한국학전공)
최기숙 교수(우리대학교 국학연구원·한국학전공)

외솔관에서 같은 층에 연구실을 쓰는 교수님으로부터 주말에 카톡이 왔다. 세계문학전집이 스무 권 남짓 찍힌 사진과 함께. 무엇을 먼저 읽으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독서야말로 취향을 타는 것이지만, 나는 그것까지 감안해서 내 멋대로 추천해 드렸다. 서사가 짧은 것과 긴 것, 문장이 함축적인 것과 담백한 것, 19세기 고전과 21세기 신간, 아시아와 서양의 것을 섞어서, 안단테, 포르테시모의 독서 리듬을 고려한 순서대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앞에 두고서 무엇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니, 풍성한 성찬을 마주한 것처럼 마음이 좋았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반에 펼쳐 놓고 사진을 찍어 보내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중에는 내가 중학교 때 전권을 필사한 소설도 있었고,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던 책도 있었다. 그때 나는 의미도 잘 알지 못하면서 문장을 옮겨 적었다. 하라는 공부를 회피하기 위해 선생님 몰래 수학책 앞에 세워 두고서. 어쩐지 문장이 멋있어서 마치 오래된 상형문자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며 적었다. 바라보고 옮겨 적으면 문장이 말하는 새가 되어 자기를 드러내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십 대 시절의 그때처럼 여전히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나 마음에 와닿는 글귀를 잉크 펜으로 옮겨 적는다. 밑줄을 그으면 안 되는 도서관 책이라서가 아니다. 일본의 시인 니시 가즈토모(西一知)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 시를 자기가 쓴 걸로 착각했었다는데, 혹시 나도 남의 문장을 내 걸로 오인할까 염려해서도 아니다. 단지 밑줄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문장을 다시 음미하는 그 느낌을 좋아할 뿐이다. 글자들은 내 손을 통해 종이 위를 걸어서 어디론가 간다. 이건 그저 내가 문장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좋은 것은 몸을 통과해서 더 좋은 곳으로 간다. 사람에게, 물질에게, 사회와 세상으로, 나 자신의 무의식과 먼 미래로까지.
요즘 학생들은 책을 안 읽어서 걱정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독서를 잘 안 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강의를 하고 시험 답안지를 받아보면, 학생들은 매우 똑똑하고 (심지어) 창의적이다. 물론 사유의 밀도가 높은 답안지에는 학생이 찾아 읽은 참고문헌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량에 비해 이렇게 놀라운 성장을 하다니. 그들의 노하우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때문이다. 듣기는 읽기 못지않은 지식 습득의 유력한 방식이다. 학생들은 듣고 필기하면서 아이디어를 확장한다. 한국인은 문맹률이 낮고 독서율도 낮다는데 집단지성은 상당하다. 다른 활동으로 지식과 교양을 보충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경로로 무엇을 익히느냐가 중요하다. 인터넷에는 가짜뉴스, 허위 정보, 얕고 무책임한 지식도 많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것까지도 거르는 능력을 스스로 갖추려 할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은 콘텐츠가 범람하기에 2배속으로 빨리 감기해서, 핫이슈가 되는 콘텐츠를 인터넷과 OTT로 섭렵하며 지식과 정보의 최전선에 도달하려는 힘겨운 모색을 가속화한다. 나만의 감정과 사색의 몫을 공유가능한 정보로 빠르게 치환하면서. 그 사이에 누락되는 침묵과 정서의 몫을 기꺼이 기회비용으로 지불하면서. 

이제 이런 노력으로 가닿을 수 있는 범위는 개인의 두뇌 용량을 초과하는 추세다. 아무리 많이 보고 들어도 도저히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없다. 몸은 하나인데, 간단히 화면을 터치해서 접할 수 있는 대상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디어 플랫폼에 작동하는 알고리즘과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의 원리에 따라 트렌드는 무섭도록 빠르게 바뀌고 있다. 자고 나면 폭설처럼 쌓이는 콘텐츠 폭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까? 이건 매일 책을 읽는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고민이다. 모든 걸 다 읽을 수 없으니, 선택해야 한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는 선택 그 자체를 신중히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성찰은 보여주기나 빨리 감기로는 도대체 해결되지 않는다. 성찰은 침묵을 수반한 사색, 진지한 독서, 진실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내게 카톡을 보내셨던 교수님 덕분에, 최근 나는 챗GPT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질문창에 처음 적어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메타인지를 하나요?” 처음엔 아니라고 하더니, 오늘은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딥러닝을 한 것이다. 스스로 빠르게 진화하지만, 방향성이 석연치 않다. 반성은 없이 울퉁불퉁한 정보를 쏟아낸다. 이제 기계가 매끈한 정보를 뽑아내며 메타인지까지 한다면,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제 인간은 기계와 인터넷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묻고, 가장 나다운 취미와 미래를 설계해 달라고 의뢰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종이로 된 책을 천천히 읽고 밑줄을 치면서,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대화를 나누는 고고학적 능력을 저버릴 때, 내가 나라는 것을 알아차려 줄 사람은 누구인가? 책에 밑줄을 긋는 신체성에 생명과 영적인 특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단지 독서하는 나의 관성을 과잉 포장하려는 변명에 불과할까? 청소년 시절에 문학작품을 읽고 옮겨 적은 글자들이 나를 문학 연구자의 길로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면, 문장을 써내려가던 그때의 손을 이제 탈신체화해서, 더 빠르게 멀리 가닿을 수 있는 기계손으로 대체해야 옳을까?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최근 나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강의를 디자인해서 이런 질문과 사색을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다. 지난주 런어스에는 손으로 쓴 자기 글씨체를 자기가 바라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사유해보자고 쓰고, 나 역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책의 문장을 옮겨 적던 과거의 손으로부터 물음표가 붙은 질문을 컴퓨터로 적고 있는 현재까지, 읽기와 쓰기를 통해 연결된 나 자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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