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주 교수(우리대학교 문과대학)
유현주 교수
(우리대학교 문과대학)

 

새학기가 시작된 대학가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언어생성형 인공지능 시스템인 챗GPT와 관련된 것이다. 오픈AI사가 발전시켜 내놓은 챗봇인 챗GPT는 방대한 분량의 언어데이터를 학습하여 사용자의 질문에 해당 분야를 잘 아는 것처럼 그럴듯한 답변을 준다. 질문에 따른 답변의 편차는 있지만, 아마도 챗GPT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 주는 가장 큰 놀라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실험실 안에서만, 혹은 무대 위에서만 가능했던 기술을 일상에서도 체감할 수 있게 했다는 점 말이다. 보통의 사용자인 우리에게 인공지능기술이란, 현재 이러한 진보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곧 ...될지도 모른다라는 미래형 문장으로 언제나 끝이 나는 무언가였다. 이러한 일이 있었고 곧 이러저러한 일들도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만을 들을 수 있었지,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알파고와 직접 바둑을 두어본 보통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 온라인에서 쉽게 사용해볼 수 있게 된 챗GPT가 우리 사회 전반에 일으킨 파장은 매우 크고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교육 분야에 한정하자면 우선 다음과 같은 일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학습자가 직접 여러 자료를 취합해 고심하며 작성해야 하는 각종 보고서에 대하여, 적어도 초안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챗GPT가 뚝딱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념 정리나 상황의 진단, 전망과 같은 글뿐만 아니라, 코딩이 필요한 작업과 학술적 글쓰기, 그리고 시와 소설의 창작까지도 포함된다. 여러 방면에서 사용해 본 이용자들의 만족스러운 체험기가 신문지상에 넘쳐나며, 이와 관련하여 교수자들은 챗GPT 사용에 대한 대응 방법을 고심 중이다.

현재까지 나온 방향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대표되는 바, 여기에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우리가 취하고 있는 상반된 입장이 각각 그 기저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앞으로 수업에서는 되도록 챗GPT를 사용해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고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지 않을, 즉 기술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는 상당히 정당한 생각에 근거한다. 이와는 다르게,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 교육 자체를 이제는 학습자가 챗GPT를 활용할 수 있는 과제 중심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미래가 이러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 주도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 또한 정당해 보이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다.

GPT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술의 진화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토론은 사실 아주 새로운 장면은 아니다. 인간을 도와주기 위해 발달하고 있는 기술이 어쩌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오히려 인간의 기능을 퇴보시킬 수 있다는 비판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계속 있어 왔으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바로 플라톤의 문자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인류가 발전시킨 가장 유용한 기술인 문자는 인간을 더 지혜롭게 만들며, 특히 기억력을 강화해 줄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플라톤은 이와는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문자와 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외부의 기호에만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즉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기억해 내거나 상기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기술에 대한 의존은 인간이 원래 가졌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핸드폰의 등장 이후 우리가 더는 다른 이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플라톤의 문자 비판은 일방향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기술이 가진 양면성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문자란 그 결과나 효과에 대한 판단을 보류할 수 밖에 없는, 불투명한 기술로서 신중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기술과 함께 으레 등장하는 낙관적인 기대나 무조건적인 거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우리는 플라톤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지나친 찬사를 보내다가 곧 차갑게 식고를 반복해 왔다. 먼저 떠오르는 것만 해도, 지난 90년대에 이루어졌던 디지털화를 둘러싼 여러 논쟁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전자적 네트워크인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당신 손끝 위의 정보를 실현하며, 이 안에서는 자유로운 정보의 이동과 함께 더는 현실의 제약이 작동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과 함께 도래한 것은 차가운 각성이었다. 디지털 기술 자체로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았다. 가상 세계라는 곳도 실제 세계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경계, 암호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온갖 버그와 바이러스로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각성이 무색하게, 2010년이 되자 소셜네트워크 붐이 일어났다. 동일한 패턴으로, ‘재스민 혁명으로 명명된 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이야기되었으며, 중심이 해체된 탈위계적 구조가 강조되었다. 소셜네트워크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에 의해 움직이며, 뛰어난 확산 도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상호 평등한 소통 도구는 되기 어렵다는 성찰은, 언제나 그렇듯 한 박자 늦게 출현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메타버스가 같은 길을 걸었다. 또 한 번 우리의 물리적인 세계 모두가 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처럼 공공연히 이야기되다가, 버추얼 환경 구현의 어려움과 빈약한 내용, 각종 규제로 거품은 빠르게 터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챗GPT가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인가? 현재와 같은 지나친 호들갑은 곧 사라지겠지만, 새로운 검색엔진으로서 언어생성형 모델은 계속 단점을 보완하며 발전될 가능성이 크다. 한번 시작된 기술적 진보의 수레바퀴는 다시 뒤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GPT와 같은 인공지능기술이 보여준 성과는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기술적 표준은 되어줄 것이다. 기원전의 문자가 그러했듯이, 200년 전의 방직기계가 그러했듯이, 90년대초의 월드와이드웹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또한 이와 함께 계속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을 요구하고 있는, 기술의 진화와 인간에 대해 오래 보류되어 온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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