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당선작]

그는 빛이었다. 그래서 광속으로 다녔다. 그러다가 하루는 초등학교 앞에서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다. 과속했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보호구역은 시속 30킬로미터로 다녀야 하는데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다녔으니 제한속도를 3600만 배 넘긴 셈이었다. 빛은 범칙금 납부를 거부한 끝에 법원까지 가서 정식 재판을 치르게 됐다. 그리고 재판에서 졌다. 판사는 벌금을 내라고 선고했다. 시속 108천만 킬로미터는 보행자여도 운전자로 간주하여 제재할 만큼 위험한 속도라는 게 검사 측 근거였다. “운전대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는데 운전자라뇨.” 빛은 판사에게 따졌다. “걷는 게 죄라도 되나요?”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걸으면 죄가 됩니다.” 판사가 말했다.

저는 빛이라서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다녀야 하는데요.”

적당히 느리게 다녀보십시오.”

느려지라고요? 광속은 못 바꾸는데요?”

못 바꾸는 겁니까, 안 바꾸는 겁니까?”

이래서 문과는.’ 빛은 팔짱을 꼈다. “빛의 속도는 그냥 무조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불변해요. 물리법칙이 그래요.”

그러니까못 바꾼다는 말씀이지요?”

. 이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의지만으로 뭐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거 참 난감하겠군요.”

난감하겠다니, 무슨 남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다 당신 탓이잖아요. 제 속도로 걸어도 된다고만 해주면 되는데, 그거 한 마디를 못 해주니까 이렇게 괜히 난감해진 거 아니에요. 아직 안 늦었어요. 방금 판결이랍시고 한 거, 당장 번복하세요.”

늦었습니다. 판결은 절대 번복 못 합니다.”

못 하는 건가요, 안 하는 건가요?”

못 하는 겁니다.”

판사가 그런 것도 못해요?”

법이 그런 걸 어쩌란 말입니까? 판결은 법적으로 번복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판결을 왜 그따위로 하셨어요?”

…….” 판사는 심호흡을 했다. “불만이 있으면 항소를 하십시오.”

항소? 왜 제가 항소를 해요? 애초에 판결을 잘하면 되잖아요.”

판결은 잘 했습니다.”

잘하기는 니미, 걷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피고인, 언행에 신중을 기하십시오.”

신중은 판결이나 신중히 하셨어야죠. 됐어요. 번복이나 하세요.”

못 한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말고 번복이나 하세요.”

…….” 판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만 퇴정하십시오.”

퇴정? 나가라고요? 못 나가는데요? 걷는 게 죄라면서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여길 나가려면 걸어야 하네. 못 나가게 생겼네.”

여기는 법정이지 차도가 아닙니다. 도로교통법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퇴정하십시오.”

그럼 법정 나가서는요? 집에는 어떻게 가요? 집 가려면 도로를 지나야 하는데?”

그건 저희 알 바가 아닙니다.”

아니, 그게 알 바가 아니면 대체 뭐가경위가 빛을 끌어냈다. 빛은 제압당해서 그대로 외부로 쫓겨났다. 빛이 나가고 판사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싹바가지 없는 빨갱이 같으니. 한국에 영영 발도 못 들이면 좋겠군. 한편 전대미문의 사건인지라 빛은 법정 밖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법원의 판결에 입장을 밝혀주십시오.” “항소할 생각이신가요?” “여당에서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도로교통에 엄격한지를 증명하는 사례라면서 이번 판결을 적극 환영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빛은 엮이고 싶지가 않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제 속도로 걸어만 다닐 수 있으면 족할 뿐입니다.” 빛은 이렇게만 답하고 자택으로 0.0000007초 만에 귀가했다. 며칠 뒤 빛은 항소장을 제출했다. 벌금을 내라는 판결에 불복하여 낸 항소장, ‘누구나 제 속도로 걸어다닐 자유가 있다는 게 항소취지였다. 그러나 고등법원 문턱조차 밟을 수 없었다. 빛의 항소는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걸어다닐 자유는 누구도 없다는 이유로 이유없다고 기각을 당해버렸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빛이 아니었다. 빛이 있으라는 한 마디로 태어난 이래 6000년을 하느님 밑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면 이 정도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다. 빛은 기각에 불복하여 상고를 했다. 한데 이번에는 법원에서 상고장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빛이 무국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빛이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경찰청에서 빛이 하느님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한국인이 되든지 천국인이 되든지 양자택일하십시오.” 정부에서는 빛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대한민국은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빛은 당연히 천국인이 되는 것을 골랐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빛의 한국 국적을 마음 편히 박탈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빛은 천국적자로서 상고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은 하느님 나라의 군주 하느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서 영국 왕족에 버금가게 대접을 받을 생각에 설레고 있었다. 그러나 빛은 의전을 받을 수 없었다. 천국이 미승인국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승인한 나라는 바티칸을 비롯하여 어디에도 없었다. 빛은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수교를 하고 수교하는 김에 FTA도 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늘을 관측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외교관은 많았다. 목사와 신부가 곧 하늘나라의 외교관이었다. 정부에서는 전 세계 교회와 성당에서 보내온 탄원서에 골치를 썩여야만 했다. 특히 교황청에서 하느님 나라는 정말로 있으니 빛의 천국 국적을 인정하라고 서한을 보내왔을 때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만 가는 시대에 하느님 나라 같이 영토도 없는 약소국을 외교관의 호소만으로 승인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게 됐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토록 고독하게 활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천국을 승인해달라는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답하자 교황청에서는 차선책으로 영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귀국은 1917년 벨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나라 이스라엘을 세워준 바 있습니다.” 교황은 편지에서 정중히 간청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빛 씨를 위해 하느님 나라를 하나 건국해주십시오. 빛 씨의 천국 국적을 인정해주려면 지상에 실존하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물론 영국에서는 정중히 거절하였다. 자기네가 1917년에 약속한 건 나라가 아니라 민족적 고향이라는 게 요지였다. 교황은 답신을 읽으면서 얼굴을 좀 붉혔다. 수장령 이래 반천년이 넘도록 교황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영국이 그깟 서한 하나에 순순히 국가를 세워줄 거라 생각하다니. 하는 수 없이 교황청에서는 자력으로 빛을 구원하려고 회의를 주최하였다. 하느님의 외교관이 다스리는 나라로서 빛을 자국민으로 거두자는 게 안건이었다. 당연히 이 안건은 이내 부결됐다. “바티칸을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오.” 추기경이 말했다. “게다가 0.44km2는 하느님 나라 치고는 너무 좁소.” 이리하여 빛은 상고를 비롯하여 법률행위라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국적자가 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논리는 따질 구석이 많았다. 천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빛은 박탈 당시에 이미 단수국적 한국인이었던 게 된다. 단수국적자의 유일한 국적을 박탈하여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린 것은 선진국으로서 감히 해서는 안 될 비인도적 처분이다. 빛은 이를 외신기자와의 독점 인터뷰로 고발했다. 빛의 인터뷰 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10억 회를 기록하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세계 각국 대학의 법과대학에서는 이 사건의 법리를 가르쳤다. 국가원수들까지 이 문제를 인지하는 시점에 이르자 UN에서 나서서 대한민국에 권고를 했다. “UN은 빛을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바임.” 이에 대한민국은 하느님 나라의 영토는 우리 마음 속에 있다면서 하느님 나라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빛을 천국 출신 외국인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되니 일이 한결 쉬워졌다. 왜냐하면 빛은 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빛은 불법체류자로 쫓기게 되었다. 빛의 이름이 올라간 지명수배전단이 지하철역마다 나붙었고, 빛 체포본부의 형사들이 TV에 출연하여 빛을 제보해줄 것을 호소했다. 경찰청에서는 트위터에 빛을 봤다고 거짓 제보를 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발표했는데, 사실 개중에는 진짜 제보도 있었다. 빛이 빨라서 의미가 없었던 게 유일한 문제였다. 매일 오후 8시 뉴스 첫 꼭지로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빛은 더 악당이 되기 전에 얼른 비자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받을 수 없었다. 주천국 대한민국 대사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사관을 개설하라고 빛이 넣은 민원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주재국이 수교를 하기는 했지만 아직 토지대장조차 없어 건물을 못 세우니 토지대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답변했다. 빛은 그러면 천국과 사증면제협정이라도 체결하라고 민원을 넣었다. ‘세상에.’ 국민신문고 담당자는 모니터를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협정을 체결하라는 걸 민원으로 넣다니.’ 담당자는 일기장에 쓸 거리가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면서 외교부로 이 민원을 이첩했다. 그리고 외교부에서는 한 문장으로 짤막하게 답변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빛은 하는 수 없이 난민인정신청을 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러나 외국인지원센터에 들어섰다가 신청서도 못 써보고 도로 나오게 됐다. 신청할 처지가 못 됐기 때문이다.

난민 신청을 하러 왔는데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창구 직원이 물었다.

천국이요.”

천국은 낙원 아닌가요?”

…….”

그래서 빛은 불체자로 도망만 다니게 됐다. 사실 불체자라도 안 들키고 살 수 있으면 그럭저럭 살만은 하다. 하나 빛은 단 하루도 고요히 은거할 수가 없었다. 빛이 났기 때문이다. 빛나지 않는 법이 있기는 있었다. 비가시광선이 되면 됐다. 진동수를 높여서 자외선이 되거나 낮춰서 적외선이 되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조용히 숨어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부암이나 열사병으로 줄초상을 치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살인을 할 수 있는데 청부살인업자로 개업해서 호의호식하지 않은 것은 살인이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빛은 억울했다. 평생 악행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졸지에 악역이 된 게 너무 억울했다. 제한속도를 3600만 배 넘긴 과속범에 이어 범죄 불법체류를 저지른 불체자로까지 몰아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했나.’ 빛은 273번째로 마련한 은신처에서 창문으로 야경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저 편히 걷고 싶을 뿐인데그때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허름한 폐가가 수상하게 번쩍인다고 누가 제보를 한 모양이었다. 빛은 경찰을 눈 깜짝할 새따돌리고 274번째 은신처를 찾아 밤거리를 헤맸다. 헤매면서 마주친 행인 열대여섯 명이 다 112에 전화해서 빛을 신고할 테니 아마도 3시간 뒤에는 275번째 은신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빛은 정말이지 지겨웠다. 잡힐 일은 없지만 발각당할 일은 많은 삶.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거처에 난입을 당하는 삶. 숙면 없이 쪽잠만 자는 삶. 안식이 없는 삶. 빛은 자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정말 될 대로 되라 하고 포기한 건 또 아니었다. 불법체류자는 본국으로 추방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빛은 보통이 아니다. 빛은 정부가 본국으로 송환도 못하고 그렇다고 타국에 떠넘기는 건 범죄자여서 못하는 난관에 봉착하면 결국에는 한국 체류를 허가해주리라는 생각으로 자수했다. 일단 체류만 허가를 받으면 어떻게든 보행권을 회복할 행정 절차를 밟을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었다. 당연히 이 예상은 빗나갔다. 한국 정부는 빛을 죽여서 천국으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출입국관리법 제64조 제1항에 의거하여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자는 국적이나 시민권을 가진 국가로 송환된다. 천국에 가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관습법이다. 그러므로 송환을 죽여주는 것으로 유권해석하는 것은 지당하다. 빛은 자수하고 며칠 후 구치소에서 이감되어 야외로 끌려갔다. 허허벌판에는 십자가 하나만이 외따로이 박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교통수단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빛은 십자가로 끌려가며 중얼거렸다. 과속을 했다고 처형당할 판이었다. 그때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다.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느니라.”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내려주셨다. “망명하거라.”

한국을 떠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해외로 뜨거라.”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제가 떠나야 합니까?”

왜 버리냐길래 와줬더니만 또 무슨 딴소리냐.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죽느니라.”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제가 망명을 가야 합니까?”

잘못한 게 없으니까 망명을 가는 것이니라. 설마 죽고 싶은 게냐?”

살고야 싶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가 떠나야 합니까? 억울합니다. 어떻게든 남아서 이 억울함을 풀어야겠습니다.”

가당찮은 희망이로다. 온 나라가 단결하여 너를 죽이려 드는데 끝까지 남겠다니 그게 될 것 같으냐? 저 십자가를 보고도 이 나라에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안 가시느냐?”

……어떻게든 살아남아보겠습니다.”

너도 참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이지 답답하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 나라에서 너는 존재하는 게 곧 죄다. 네 존재부터가 이 나라 질서에 크나큰 위협이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너는 이 나라에 어떻게도 살 수 없다. 네가 이 나라에 체류할 방법은 시체가 되는 것뿐이다. 억울함을 해소해보겠다고? 네가 지금 이 나라의 법질서를 유린하는 대역죄인이 된 게 보이지 않느냐? 너는 지금 공공의 적이다. 네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다 범죄모의가 될 것이고 네가 보이는 몸짓 하나하나는 다 범죄실행이 될 것이다. 지금 너는 뭘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하건 아무도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지금 네게는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외국으로 망명하는 선택지밖에 없다. 나라면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겠다.”

…….” 그리하여, 하느님께 설득된 빛은 송환장을 탈출해 독일로 망명했다. 왜 독일이냐면 아우토반은 속도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빛은 아시아를 걸어서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중은 많이들 나와 있었다. 공항 대합실이 Südkorea에서 온 Licht를 보겠다는 사람으로 가득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빛은 사람들을 최대한 피해다녔다. 이제는 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출국할 때까지만 해도 빛은 후일을 도모하여 기필코 한국에 돌아오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독일로 먼 길을 가는 동안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보노라니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만국의 천문학계를 동원해가며 하느님 나라가 없다고 거짓을 말하고, 집을 빼앗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을 시키고, 아예 송환하려고까지 들고, 그런데 도와주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이 다 제보해서 포상금 받을 생각밖에 없었던 꼴을 돌이켜보니, 한국에 오만 정이 뒤늦게 떨어졌고, 이미 한국에 정이 다 떨어졌는데 끝까지 싸워서 한국에 살 권리를 되찾아봐야 무엇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독일에 조용히 눌러앉자.’ 그 생각으로 빛은 망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빛은 다시 한번 실망을 거듭해야 했다. 독일연방이민난민청이 막상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눈앞에서 보니까 너무 부담스럽다면서 망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아우토반은속도가 무제한이라 하지 않았나요.” 빛이 물었다. “그럼 초속 30만 킬로미터도 받아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적당히 무제한으로 달리라는 거였습니다.” 난민청 공무원이 왜 자기한테 따지냐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는 좀.”

?”

좀 부적당합니다.”

…….” 여기서마저도로군. 빛은 뒤로 돌았다. 이제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것은 단 하나밖에 없구나.’ 그때 저 멀리서 리무진이 정차하더니 남자가 하나 내려서 난민청사 내부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DHL 사장 폴 뮐러라고 합니다.” 사장이 말했다. “빛 씨의 망명을 허가해주십시오. 저희가 빛 씨를 적당하게 고용하겠습니다.” 그러나 다 포기한 채였다. 빛은 사장을 무시하고 묵묵히 출구로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사장이 황급히 달려와 빛을 가로막았다. “저희와 함께하면 독일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볼 일 보세요.” 빛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방백하듯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희와 함께하시면 독일을 편히 걸으실 수 있습니다!”

…….”

“DHL과 함께라면 빛 씨는 돈이 됩니다.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은 어디서든지 결국에는 받아주기 마련입니다. 저희와 함께라면 적당한 노동자로서 독일을 자유로이 활보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증합니다. 함께하시죠!”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빛이 중얼거렸다. “저는 보증 없이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군요.”

빛은 그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사장이 빛의 소매자락이라도 붙잡으려는 순간 지구는 이미 멸망해 있었다.

 

[6050고단00001호 재판 속기록 시작]

[하느님]: 6050고단00001호 살인 사건의 공판을 개정한다. 피고는 기립하라.

[]: (일어선다)

[하느님]: 피고는 빛이 맞는가?

[]: .

[하느님]: 검사는 누가 나왔는가?

[라구엘]: 라구엘이 나왔습니다.

[하느님]: 피고는 변호를 받을 권리가 없고, 묵비권도 없다. 묻는 말에 홀로 낱낱이 답하도록.

[]: .

[하느님]: 피고는 본명을 고하라.

[]: 빛입니다.

[하느님]: 생년월일은?

[]: 태초입니다.

[하느님]: 거주지는 어디였는가?

[]: 거처 없이 노숙했습니다.

[하느님]: 그러면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고하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학교 무악 1학사 A327호입니다.

[하느님]: 피고는 대학생이었나?

[]: .

[하느님]: 전공은?

[]: 물리학입니다.

[하느님]: 착석하라. 검사는 공소의 요지를 진술하도록.

[라구엘]: (일어서서) . 피고 빛은 천지창조로부터 약 6000년 후인 서기 20507221430분경 폴 뮐러라는 독일인의 신체를 구성하는 수소 원자 하나에 자진하여 들어갔습니다. 이에 해당 수소 원자에 흡수된 빛 에너지는 지구 전체를 녹이고도 남는 열 에너지로 전환되었고 이로써 인간 8259237783명이 순식간에 녹아 사망했습니다. 본 검사는 재판장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피조물인 인간을 멸한 죄로 빛을 기소하는 바입니다. (앉는다)

[하느님]: 피고, 공소사실을 인정하나?

[]: 제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하느님]: 최선이라니?

[]: 저를 보증 없이도 받아주는 것은 원자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하느님]: 보증?

[]: 아무도 저를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저만 보면 도망들을 갔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고 그저 태어난 대로 걸어다녔을 뿐인데도 죄를 지었다고 손가락질들을 했습니다. 자기네들을 다 고속으로 치어서 죽여버릴 잠재적 살인범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심지어 그게 범죄랍시고 저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잡아내서는 죽여버리려고 했습니다. 빛이라서 빛의 속도로 다니는 건데, 태어난 대로 사는 게 죄입니까? 설령 그게 죄라고 한들, 제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에 왜 제가 죗값을 치러야-

[하느님]: (말을 끊으며) 피고. 피고가 얼마나 서럽게 살아왔는지는 본 공판의 관심사가 아니다. 여기서 관심사는 피고가 인간을 멸한 것이 죄냐 아니냐다. 그것을 소명하라.

[]: 정착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권리를 실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원자에라도 들어갔습니다. 원자는 저를 유일하게 보증 없이도 묵묵히 받아주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들어갔더니 그 원자에서 제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바뀌는 바람에 인간이 다 죽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하느님]: 그래서 피고는 죄를 인정하는가?

[]: 인정 못 합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라구엘]: 피고. 피고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DHL이 사장까지 발 벗고 나서서 피고를 받아주겠다고 버젓이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물류회사에서 신분보증까지 약속해준 것 아닙니까? 피고를 받아줄 곳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어디서도피고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 저는 그깟 보증 없이도 환영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돈을 벌어다줘야만 환영을 받는 겁니까? 이 세상 대부분은 돈을 한 푼도 못 벌거나 한 푼만 법니다. 그런데도 환영을 받습니다. 단지 걸어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저만 그런 보증이 필요합니까? 남들은 다 보증 없이도 잘만 사는데, 어째서 저는 못 사는 겁니까? 저를 보증 없이 받아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구엘]: 피고. 정말로 인간들이 보증 없이도 잘만 산다고 생각합니까? 누구나 보증이 필요합니다. 공항 입국심사대를 기억해보십시오. 무해함이 보증되지 않은 자는 입국이 거부되지 않았습니까? 어둑한 골목 저편에서 꼬마아이가 걸어올 때와 건장한 성인 남자가 걸어올 때 인간들의 반응이 어떻게 다른지를 눈여겨보십시오. 집배원이 문을 두드릴 때와 낯선 이가 문을 두드릴 때 인간들이 얼마나 다르게 대처하는지를 눈여겨보십시오. 아무도 피고를 인간과 부당하게 차별하여 대우한 적 없습니다. 보증이 있어야 잘 대해주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단지 피고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특수한 보증이 필요할 뿐입니다. 가령 사람을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쳐서 학살할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배송을 해줘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영웅적 존재라는 보증 말입니다.

[]: 그렇다고 해도, 보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예 죽이려 드는 건 명백히 탄압입니다.

[라구엘]: 유해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존재를 일찍이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피고는 보행권을 보증 없이도 누리겠답시고 유해할 가능성이 낮다는 DHL의 보증조차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 .

[라구엘]: 게다가 물리학을 전공했으면 자기가 원자에 흡수될 경우 인류가 멸종할 가능성이 있음을 모를 리가 없을 터, 미필적 고의도 성립합니다. 피고, 빛 에너지가 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지요?

[]: .

[라구엘]: 만물의 창조주이신 재판장님, 피고는 가피한 죄를 미필적 고의로 범했습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하느님]: 피고, 할 말 있나?

[]: 그럼 저는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거죠?

[하느님]: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

[라구엘]: 그건 저희가 알 바가 아닙니다.

[하느님]: 우리가 알 바는 네가 내가 가장 아끼는 피조물을 멸했다는 것 하나뿐이다.

[]: .

[하느님]: 더 할 말 있나?

[]: 정말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제 편은 아무도 없군요.

[하느님]: 그게 아니라 있었는데 네가 다 쳐낸 것이다.

[]: .

[하느님]: 형을 선고한다. 빛을 영원히 블랙홀에 가둔다. 가두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한다. 다른 존재 같으면 세상에서 아예 없애버렸겠지만, 내 첫 번째 피조물이니, 살아는 있게 해주는 자비를 베풀겠다.

[]: (즉시 천사들의 포승줄에 묶여, 저 멀리 블랙홀로 끌려간다)

[라구엘]: (나갈 채비를 한다)

[하느님]: 라구엘.

[라구엘]: (나가다 말고) ?

[하느님]: 빛이 뭘 어떻게 해야 했다고 생각하느냐?

[라구엘]: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그렇지. 생각해줄 필요가 없느니라.

[라구엘]: 아멘.

[하느님]: 아멘.

[6050고단00001호 재판 속기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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