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빈(EIC·19)
백문빈(EIC·19)

 

나는 언제나 행복을 좇았다. 사람은 선하고, 옳게 변화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땅콩만 할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배운 교리로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자라나며 겪은 우리 사회는 예외가 더 많았다. 남을 짓밟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세상, 타인을 이용하지 않으면 이용당하는 세상. 하루하루 숨 가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도 마찬가지였다. ‘

'우리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단순한 소속감 때문은 아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란 단어는 울타리가 돼준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동경한 대학 생활도 그런 의미에서 기대가 컸다. 사회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울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머리가 크고 나서 만난 친구는 평생 친구가 아닐 수 있다며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연()이라 믿고 싶었다. 사람을 이익으로 환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할지언정, 그의 단점으로 내가 피해를 볼지언정, 나 역시 완벽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이므로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 굳게 믿은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나 역시 이기적인 군상의 일부였고, 누군가에는 그저 대안 1’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외면받는 일은 나를 자꾸만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포용하려 노력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울타리는 허울이었다. 몸만 자라고 마음은 여전히 어렸던 내가 그려낸 환상이었다. 대학 생활은 이를 증명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집단에서는 정치와 갈등이 발생해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못했다. 본질이 아닌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개할 수밖에 없었다. 실망을 거듭하며 내가 선택한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도망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비겁하다 할지도 모른다. 사람을 좋아하고, 상처에 민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의문이 든다. 그것이 왜 그렇게 지탄받아야 할 일인지 말이다. 시대의 변화와 사회구성원의 다원화는 세상을 바꿨다. 하지만 그의 동의어가 각박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공감, 배려, 이해만 있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에 나는 호소하고 싶다. 우리가 우리로 남을 수 있도록, 서로의 다름은 다름으로 두고, 같음에 집중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로 남으려면이란 말은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대사로,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인물들이 우리로 남으려면 대기업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상위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과 섞이지 않아야 하며,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다른 누군가가 침범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라는 단어가 그어주는 울타리는 참으로 좁고 얄팍한 것이 돼버렸다. 비단 드라마에서만 보이는 풍경은 아니다. 동질성과 이질성 중, 이질성에 집착하고 나누고 배척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 보면, 이런 구분과 배척은 정말로 부질없는 짓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일생이란 참으로 허망한데, 어차피 앞서거니, 뒷서거니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에도 짧은 인생, 무엇을 위해 우리는 차별하고, 물어뜯으며, 불편해하는 일상을 당연시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위선을 직시한다. 배척을 일삼는 이들에게 실망하면서, 결국 나도 그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반성을 남겨본다. 대신 또 다른 희망을 품어본다.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이기적이기만 한 이들로 가득 찬 세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힘들고 지쳐 넘어져 있다면, 그 어떤 이라도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또 나의 주변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나는 다시 꿈꾼다. 세상은 아름답고, 인간은 선한 존재라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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