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우 총무국장(보건행정·18)
안태우 총무국장(보건행정·18)

기원전 470년 로마의 평민들은 자신들의 개혁안을 인정받기 위해 반란을 결심했다. 19세기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한 파업을 결심했다. 1968년 수천만의 프랑스 청년과 노동자들은 미국의 월남전 참전 항의를 계기로 68혁명을 결심했다. 이런 결심은 역사 속 사례만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자는 취재에서 정보 비대칭성의 상황에 놓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도부 기자로 활동하며 기사란 수많은 판단의 결실물임을 매번 깨닫곤 했다. 나의 관점을 피력하기 위해 취재원을 물고 늘어지며 설득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때로 취재원은 의미심장한 말로 나를 압박하기도 했다. “기자님, 제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셨죠?” 

‘내 말이 뭔지 알겠어?’라는 짧은 한 문장, 내게는 결코 의문문이 아니었다. 취재원과 나의 관계에서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복종하라’는 명령, ‘너의 질문은 무지로 인한 것’이라는 권력관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는 질문으로 들렸다. ‘정보 비대칭성’이 아무리 취재의 기본 원칙이라 하더라도, 학교 본부가 결정한 내용에 의문을 던지자 ‘이러이러한 의도가 있으니, 나름의 결심이 담겼다’고 보더라도 이 사례는 타인이나 나의 결심이 누군가에게 압박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곤 했다. 

결심하는 마음은 자신의 경험 내에서 최선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뒷받침된다. 나는 미래캠 기자로서 춘추 지면에 남겨야 할 미래캠 역사가 무엇인지 언제나 고민했다. 우리신문사를 거쳐간 모든 미래캠 출신 기자들도 마찬가지 경험을 해왔을 것이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결심, 미래를 꿈꾸는 결심의 마음으로 지면을 꾸려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심하는 마음을 관계 사이에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합의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린 오늘날에서도 우리의 불화는 작은 괴리에서 출발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의도를 설명하기 바쁘다. 그것은 서로 간 소음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화는 논쟁을 일으킨다. 논쟁이 있어야 각자의 괴리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네 일상 속에서도 좁혀지지 않는 어긋남은 여전하다. 불화는 일상에서 사회현상으로 확장된다. 9. 11 테러, 현 정권의 노란봉투법 논쟁, 장애인권 운동을 둘러싼 여당의 태도나 갈등, 긴축정책의 건강권 관련 예산 우선 삭감 등 소득과 분배의 불평등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부나 기득권층에는 거리의 낙서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선 사례들에서 해결의 요소는 언제나 인간학적 질서라는 보편성에 있었다. 평민들의 반란에 원로원의 대표 교섭인으로 뽑힌 아그리파는 그들을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화’한다. 19세기 노동자의 움직임은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같은 사람임을 조금씩 깨달으며 노동권 실현의 역사로 이어졌다. 68혁명은 실패했음에도 자유란 무엇인지 인류사에 고민할 난제임을 고했다. 인류사 내내 반복돼 왔지만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야 건전한 논의가 이뤄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영원한 아마추어다. 결심하는 마음 간 관계가 외려 불화를 발생시킨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수련의 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결심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숭고하다. 그때의 결심이, 불화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음을 역사가 보여줬듯이. 소음에 불과했던 거리의 낙서들이 목소리가 돼 보는 이들에게 울림을 줬듯이. 

 

“정치의 보편성은 각각의 부분의 자기 자신과의 차이의 보편성이자
공동체의 구조로서 쟁론의 보편성이다” 
- 자크 랑시에르 『불화』 중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