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한 사진영상부 기자(글창융경영·21)
김대한 사진영상부 기자(글창융경영·21)

여덟 살 때, 우연히 포털 사이트에서 내 이름을 검색한 적이 있다. 연예인의 인물정보 항목을 보고 내 이름도 검색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동명이인인 사람이 저지른 사건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에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와 이름이 같아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선택한 방법은 아픈 마음을 가슴 한편에 묻어두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발생한 수많은 참사를 알게 되고 이후에도 참사가 발생하는 모습을 마주했다. 그때마다 대부분 참사는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됐단 사실이 가슴을 조여왔다.

우리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가장 가고 싶었던 취재 장소는 대구였다. 여덟 살 때부터 묻어둔 아픈 마음을 덜어내고 싶었다. 아이템을 발제하고 취재계획서를 작성한 뒤 카메라를 챙겨 대구행 열차에 올랐다. 나는 참사가 발생했던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의 추모 장소로 향했다.

추모 공간에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부모는 자녀에게 과거의 사건을 알려주고, 함께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깨달았다. 슬픔을 직접 마주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과거의 잘못을 깨우칠 수 있다. 아픈 마음을 덜어내기 위해 방문한 내가 부끄러워진 동시에 기사의 방향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소방관은 내게 “대학생이 이곳에 방문하는 일이 드물다”며 “젊은 친구들이 관심을 두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의 기억을 지우려 하지 않는가. 대구 외에도 참사가 발생했던 장소를 방문했다. 성수대교 참사 추모를 위해 마련된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은 고속도로에 갇힌 교통섬에 위치해 접근할 수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위령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삼풍백화점 위령탑은 사고 현장과는 멀리 떨어진 공원의 구석진 곳에 자리했다. 

당연히 추모 공간의 존재조차 모르는 주민들도 많았다. 위령비 앞에서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구도를 고민하는 동안 추모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장에서 시민 인터뷰를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홀로 남겨진 추모 공간에서 씁쓸한 마음을 다잡고 카메라를 들어야만 했다.

현장에서 깨달은 사실과 직접 찍은 사진들을 기사에 꾹꾹 눌러 담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독자가, 우리 사회가, 참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아픈 기억을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10·29 참사에서 나는 다시 한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고 소식을 접한 후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희생자들에게 애도가 아닌 비난의 목소리가 향했다. “왜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서 사고를 당하냐”, “할로윈 문화를 즐기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며 이태원에 방문한 사람들을 질책하는 모습을 보고 희생자들에 대한 혐오가 발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못의 주체가 왜 문화를 즐기러 간 시민들이어야 하는가. 지금 당장 진심 어린 애도가 필요하다는 내 생각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수많은 인파가 몰려 사고의 위험이 충분히 예견됐음에도 적극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또 막을 수 있었던,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참사였다. 정부는 행정적인 애도 이후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일선 공무원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고 안전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는 책임을 회피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참사를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다.

참사를 마주하지 않는 사회에서 진정한 반성은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안전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마음에 지녀야 한다.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도 올바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고통에 미안한 마음으로 함께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만 한다. 그렇게 슬픔을 온전히 바라본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참사의 의미를 진정으로 되새기며 살아갈 때,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슬픔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내가 대구에 처음 갔던 날, 슬픔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직시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처럼.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