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우 사회부장(행정/사회·17)
복건우 사회부장(행정/사회·17)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는 삭발 투쟁을 하는 장애계 활동가들의 투쟁결의문이 실린다.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활동가들은 삼각지역 승강장에 모인다.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정부와 국회에 촉구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130명이 넘는 활동가가 머리를 밀었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고 외친 지 어느덧 일곱 달째다.

비마이너330일 경복궁역에서 시작한 삭발 투쟁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56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용산 근처 삼각지역으로 투쟁의 자리를 옮긴 뒤에도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바리캉 소리가 울려 퍼지는 현장을 쫓아다니고 있다. 많은 언론이 장애인 권리 투쟁을 비장애인 시민 대 장애인의 구도로 보도하는 데 반해 비마이너는 누구보다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매일같이 승강장 앞에서 머리를 밀고, 때로는 지하철 바닥을 기는 장애인들의 삶의 무게를, 그 삶에 담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삭발 투쟁은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가 아니라, 존엄한 삶의 가치를 보장해달라는 호소에 가깝다. 누구는 38년 인생 처음으로 머리를 밀고, 누구는 20년 넘게 시설에서 살다 나와 삭발을 결심한다. 8차 삭발결의자인 박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조직실장은 투쟁결의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머리를 깎는다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 중증장애인들이 지금까지 길렀던 머리를 깎는 것은 내 신체 일부를 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삭발 투쟁에는 저마다 짊어진 장애의 무게가 담겨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삭발 투쟁은 우영우와 만났다. 69차 삭발결의자인 이라나 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마치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드라마 주인공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천재 변호사다. 비장애인에게 큰 폐를 끼치지 않고, 무해하고 귀엽고, 독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러한 우영우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화면 속 우영우 너머에는 갈등과 타협, 좌절과 분노 사이에서 투쟁하는 수많은 현실의 우영우들이 있다. 장애인 활동가들의 투쟁결의문은 우영우의 목소리를 통과해 복잡다단한 현실 세계로 시민들을 안내한다. 자폐를 섬세하게 고민하며 장애인을 향한 일상적인 차별을 다루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등장은 드라마 바깥에서 장애운동이 축적해 온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지난 13일 아침 8시 삼각지역 승강장 앞에서 진행된 삭발 투쟁 현장. 삭발이 끝난 뒤 머리띠를 두른 홍원희 마포가온센터 활동가가 붉은색 폴리스 라인 너머로 보인다. 사진 복건우
지난 13일 아침 8시 삼각지역 승강장 앞에서 진행된 삭발 투쟁 현장. 삭발이 끝난 뒤 머리띠를 두른 홍원희 마포가온센터 활동가가 붉은색 폴리스 라인 너머로 보인다. 사진 복건우

 

현실 속 장애인들은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어렵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와 자립하기가 어렵다. 장애 때문이 아니라 제도와 인식의 부재 때문이다. 김도현이 쓴 장애학의 도전에 따르면 장애의 원인은 개인적 손상에 있지 않고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있다. 시설사회의 모든 체제가 장애를 비정상적이고 문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돌봄의 선택지는 시설가족이 전부다. 시설에서 고립되어 살아가거나, 가족이 짊어져야 할 부담으로 남거나 둘 중 하나다. 시설 밖은 위험하다느니, 장애인의 시설 만족도가 높다느니 하는 편견 어린 말들도 이들의 탈시설과 자립을 막는다. 2012년 인권위가 발표한 시설거주인 거주 현황 및 자립생활 욕구 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자발적 시설 입소 비율이 82.8%에 달한다. 장애는 장애인 당사자를 탈각화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어렵사리 시설에서 나와도 장애인은 지역사회 곳곳으로 이동하기가 어렵다. 장애 때문이 아니라 이동권을 보장해야 할 정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1년째 이동권 보장을 외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런데 예산 반영이 의무화되지 않았다. 허울뿐인 약속이었다. 이동이 힘들면 일할 권리도, 교육받을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가 장애 문제의 시급함을 가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칠 때, 시민들은 뒤따라 작은 불편을 호소하며 장애인 권리 보장에 침묵하게 된다. 그 결과 시설사회 위에 비장애중심주의가 포개진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장애인은 차별받고 방 안에 갇혀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의 삶은 때로는 비루하고 열악하지만, 때로는 그 헐거운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가장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투쟁결의문에는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을 차별이자 문제라고 말하며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꿔 온 장애운동의 역사가 묻어 있다. 1984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김순석 열사, 2009년 시설 수용을 거부하며 탈시설 정책의 토양을 일군 마로니에 8, 2022년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일곱 달 넘게 삭발 투쟁을 진행 중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들이 견인한 장애운동은 더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로 이동하기 위한 삶의 기록이자 일생의 여정이다.

장애인에게 존엄한 세상이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진 않을지 걱정하는 것보다, 그러한 세상을 상상하는 시대적 감각이 실종되진 않을지 걱정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곁이 필요하다. 시설로 밀려난 이들에게 동료 시민의 곁을 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장애운동의 곁을 채워주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그때 장애해방이라는 구호는 놀라운 속도로 현실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결실을 만들어내는 싸움은 쉽게 그치지 않고 기어코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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