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춘추와 함께 현대사를 겪어낸 안병영 교수를 만나다

연세춘추를 둘러싼 위기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안병영 명예교수(우리대학교·행정학)는 4·19 혁명 직후인 지난 1960~1961년 연세춘추의 학생기자로 근무했고, 유신 말기인 1976~1977년 연세춘추의 주간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두 격동기를 연세춘추에서 보낸 안 교수로부터 연세춘추가 당면해야 했던 위기에 대해 들어봤다. 

 

Q. 연세춘추 기자와 주간을 지내던 당시 업무 강도는 어땠나.

A. 학업과 병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의 강도가 높았다. 주간 교수로 일한 지난 1976~1977년도에는 학생기자들이 목·금·토요일을 모두 신문 제작에 투자했다. 인쇄가 이뤄지는 토요일에는 통금시간인 오전 12시까지 마감에 쫓기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놀라운 열정과 높은 몰입도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Q. 연세춘추 주간을 맡았던 계기가 있나.

A. 지난 1976년, 유신정권의 정보기관은 연세춘추 취재부장 김수길 동문(경영·74)이 연세춘추 칼럼 코너 ‘백양로’에 쓴 체제 비판적 글을 문제 삼아, 주간 교수를 교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대학교 총장이었던 이우주 총장이 나를 새로운 주간 교수로 임명했다. 아마도 이 총장은 내가 당시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이고, 무엇보다 학창 시절에 연세춘추 기자로 활동했기에 학생기자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Q. 학생기자부터 주간 교수까지 신문발행에 임하는 책임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A. 4·19 혁명 직후의 격동기와 유신 말기라는 두 주요한 시기를 연세춘추와 함께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을 빌리자면, 학생기자 때는 ‘신념의 윤리’에, 주간 때는 ‘책임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학생기자라는 신분으로 민주혁명의 격류에 직접 참여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과 열정, 그리고 젊음의 순수가 앞섰다. 주간이 됐을 때는 연세춘추 학생기자들의 안위와 장래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Q. 주간을 맡았던 유신 말기, 언론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극심했다. 연세춘추는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나.

A. 연세춘추는 학내 민주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당시 정보기관의 기관원들이 학내에 상주하면서 학교의 구석구석을 감시했다. 저항의 기회를 노리는 연세춘추의 숨통을 끊고자 했던 것이다. 기관원들은 신문을 낼 때마다 거칠게 시비를 걸었고, 매번 휴간하거나 배포를 중지하겠다며 위협했다. 주간인 나는 기관원들과 다투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생기자들의 기사를 점검하며 표현의 수위를 낮추거나 어구를 조금씩 고치기도 했다. 주간으로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만일의 경우 학생들에게 덮칠 화에 대비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가 검열관처럼 느껴져 자멸하기도 했지만 내 고충을 이해한 학생기자들은 가시적으로 반발하지 않았다. 다만 학생기자들은 주간인 내가 방패막이 돼 자신들의 글을 임계선 이하로 고쳐줄 것이라 믿고 거침없이 시국에 대한 울분을 토했기 때문에 주간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대학 언론의 민주적 소명을 지키면서 학생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아울러 당국의 모진 철퇴를 피하는 황금률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Q. 연세춘추 활동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A. 그 엄혹한 시기에도 학내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기자를 지망했고, 그중에서 뽑힌 학생기자들이 하나같이 빼어났다는 사실이다. 학생기자들은 시대의 양심이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짧은 기간 동안 이처럼 빼어난 재목들이 집중해서 모인 것은 연세춘추 역사상 전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17년 겨울,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학생기자 15명과 40년 만에 반가운 해후를 했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학생기자 대부분이 걸출한 인재가 돼 사회 발전에 큰 몫을 해낸 모습을 봤을 때의 보람이 기억에 남는다.

 

Q. 연세춘추를 떠날 때의 소회는 어땠나.

A. 한마디로 착잡했다. 주간 1년을 넘어가며 심신이 너무 피폐해졌다. 깊어지는 고뇌가 건강을 해쳐 위궤양으로 1년 만에 체중이 10kg이나 빠졌다. 엄혹한 시대의 중압을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여러 차례 ‘연세춘추 탈출’을 간청했지만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좌절됐다. 결국 생각해 낸 방안이 외국에서 연구비를 받아 이를 구실로 주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독일로부터 훔볼트 연구비를 받아 독일 만하임 대학으로 떠나면서 연세춘추를 하직했다. 안도감과 학생기자들을 향한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부디 연세춘추가 이 시대적 난관을 극복하고, 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빌었다.

 

Q. 학내 공식언론사로서 연세춘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A. 내가 연세춘추와 인연을 맺었던 두 시기 모두 정치적 격동기였다. 따라서 대학 언론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그곳에 온갖 관심과 노력을 과도하게 쏟았다. 그러다 보니 학문공동체라는 대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뤄졌다. 그러니 학내 언론은 마땅히 바깥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줄이고, 대학공동체의 내적 잠재력을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세춘추가 부지런한 보도 매체이자 연세인의 정서적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넘어 모든 연세인을 보다 격조 높은 가치공동체의 일원으로 묶어주길 바란다. 이를 통해 연세 사회가 지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Q. 연세 사회를 위해 연세춘추는 어떤 노력을 이어가야 하나.

A. 연세춘추가 세 가지에 힘써주길 제안한다. 첫째로 탈이념화다. 이념과 진영에 갇히기보다는 열린 마음,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한다. 둘째로 변화의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연세인의 거시적이며 장기적인 조망을 다듬는 데 한몫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세인의 지적 토대를 튼튼히 세우는 데 기여하라는 부탁이다. 요즘처럼 학문 간의 교류와 통섭이 일반화된 시대에는 폭넓은 지적 이해가 필수다. 이는 학문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굳건한 지적 토대는 연세인들의 사회적 성공에 가장 확실한 바탕이 돼 줄 것이다.

 

 

글 강하영 기자
kang_hayeong@yonsei.ac.kr
송혜인 기자
hisongs@yonsei.ac.kr
장호진 기자
bodo_ugogir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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