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민 사회부장(정외·17)
박경민 사회부장(정외·17)

 

연세대가 윤동주 시인의 모교라는 점이 너무도 싫었다. 처음 연세대에 합격했을 때 든 생각이다. 어째서 그가 시대를 밝힌 문학가로 칭송받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능 문학 속 그의 시어를 들여다볼 때마다 환멸을 느꼈다. 스스로를 곱씹기만 하는 그의 소극적인 태도가 부끄러웠다. 대신 내 세계의 위인은 이육사 시인이었다. 그의 문장에서는 단단한 희망의 의지가 엿보였다. 생애도 마찬가지였다. 속세의 ‘이원록’에서 벗어나 감옥의 이름 ‘264’로 역사에 남겨지다니. 그래서 그가 품었던 엄정함과 단호함을 좇았다.

이육사처럼, 내 단호함을 벼리고자 우리신문사에 입사한 지가 벌써 1년 반이다. 처음부터 대학언론에 대한 환상 따위는 없었다. 애당초 나에게 연세춘추는 ‘기술’을 학습하기 위한 곳이었다. 기자의 문법과 인프라를 접해보자고 생각했다. 이육사처럼 행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사회가 아니라 한국사회를 바라봐야 했다. ‘대학의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는 신념은 면접이나 자소서에서나 유효한 명제였다. 그 대신 ‘기성의 악습과 학생의 미숙함의 합쳐진 공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학생사회를 외면했다. 그 미숙함이 끔찍했다. 분명 2018년도 총여학생회 해체 사건은 환멸을 더욱 마음 깊은 곳에 새긴 순간이 아니었나.

그래서 대학이 아닌 사회 문제를 조립하는 데 천착했다. 이곳에 마련된 일련의 도제식, 혹은 공장식 시스템을 즐겼다. 기사 쓸 거리를 발제한다. 인터뷰이를 찾아 무한정 메일과 전화를 돌린다. 전문가 인터뷰이 셋, 당사자 인터뷰이 둘, 조명할 거시 담론 하나까지. 이를 조합해서 초고를 완성해낸다. 곧 초고의 문장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수정하는 과정에서 부장과 국장, 교수님의 말에 따른다. 힘듦을 느낄 새도 없다. 감정이 거세된 상태로 한 단어씩 적어나갔다. 윤동주에 대한 불신도, 이육사에 대한 사랑도 희석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결과물이 부끄럽진 않았다. 매 취재 어떤 현장이든 방문했으니까. 대학가 상권 쇠퇴에 관한 기사를 작성할 때는 이틀간 상권 내 가게 20곳을 넘게 방문하며 점주를 인터뷰했다. 영하의 날씨에 신문 배달 노동자 정 씨를 인터뷰할 때는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그와 함께 걸으며 신문을 배달했다. 노점상 정 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흘간 매 끼니 분식을 먹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질지라도, 한낱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들에 대한 감정이 묽어졌을지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 무너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지난 6월, 별안간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학내 누군가 청소노동자 시위를 고소했단다. 학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차마 기사를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집단은 원래 미숙하면서 악랄한 곳이니까’라는 말로 그 생각의 틈새를 여몄다. 곧 고소를 일부의 일탈이라 여겼다.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의 해법을 마저 공부했다.

이상함의 실체는 바로 부끄러움이었다. 우연히 학교에 온 날, 청소노동자들이 앉아서 시위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나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을 배달하던 정씨의 모습과도, 한여름 좁은 노점상에서 선풍기 두 대만을 갖고 더위를 이겨내던 정씨의 모습과도, 백양로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내 세상 속 같잖은 신념과 그들이 세상 바깥으로 내미는 생존의 목소리가 충돌한 순간이었다. 그러자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김수영 선생의 글귀가 선명해졌다. 윤동주를 외면한 사이,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소홀했던 옹졸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별안간 일어났던 붕괴 이후, 마음껏 부끄러워했다. 윤동주가 시어에 적었던 가치를 되새기며 수없이 반성했다. [청소노동자 기획]을 꾸렸다. ‘반성문’이라는 단어를 <기자 주>에 달았다. 우리는 균형이라는 말로 어떤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는지, 같은 공간 안에 있더라도 다른 존재를 어떻게 외면하고 있었는지, 돌아보려 했다. 어렴풋이나마, 그가 전하는 성찰의 기치를 알 것만 같다.

이제는 윤동주도 좋아한다. 나는 나를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내 문장은 얼마나 세계와 맞닿아 있는가. 그렇다면 내 세계가 외딴섬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질문하라. 이것이 무릇 기자가 새겨야 할 십계명의 첫 번째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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