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교수(우리대학교 교목실)
김동혁 교수(우리대학교 교목실)

 

<시선>에 기고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고민이 많이 됐다. ‘내가 학생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틀쯤 고민한 끝에 그냥 내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목사이기도 하니,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좀 해 보겠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삼 남매가 살았는데, 예수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어느 날 오빠가 죽을병에 걸린다. 성경 속 예수는 죽을병도 고치는 능력자로 나오지만, 하필 그때는 먼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오빠는 죽고 만다. 예수 일행이 유족에게 도착했을 때 한 동생이 예수를 원망한다. “선생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는 답한다. “그대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겁니다.” 예수는 동굴 무덤 앞으로 가서 입구를 막아 둔 바위를 굴려 낸다. 그러고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오빠를 되살아나게 했다고 성경은 말해 준다. 

이야기의 역사성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지만, 기적들의 과정이 설명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기적이 일어났다고만 쓰여 있고, 독자는 그 이야기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자 하는 부분은 예수가 오빠를 살리기 전에 쓰여 있는 짧은 문장이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원문의 단어 수를 기준으로 하면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울었을까?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예수가 신 혹은 신의 아들이라면, 앞으로 펼쳐질 일을 당연히 알았을 텐데. 이 일이 해피엔딩이 될 것임을 알았을 텐데. 내 생각에 이건 공감이다. 바로 앞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한 동생이]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해 괴로워하셨다”(33절). 예수가 신인지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예수가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이야기 속 예수가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알고 그 감정을 함께 느꼈다는 점을 일러 준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가족, 친구들과 한 마음, 한 감정이었다. 

교수인 내가 젊은이들에게 ‘난 자네들이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네.’라고 말하면 ‘꼰대’ 같아서 좀 꺼려지긴 하지만, 이런 글에서 그런 말을 안 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나는 우리 연세의 젊은이들이 공감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리더한테 가장 중요한 덕목은 판단력과 공감력이라고 생각된다. 위기 상황에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 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덕목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없을 것 같다. 우리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전문 지식과 내공을 쌓음으로 이 덕목을 길러야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고. 그런데 공감의 능력도 판단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을 돌이켜 보면, 일할 때 제일 섭섭한 경우는 윗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줄 때였던 것 같다. 학생들도 교수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가 섭섭하지 않을까? 반대로 학생들의 상황과 어려움을 잘 공감해 주는 교수가 있다면 학생들이 신뢰할 것이다. 가끔 이런 소망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서민들의 마음을 안다면. 이 나라의 어른들이 청년들, 나이 어린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권력자들이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돈 있는 사람들이 돈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한여름에 에어컨 바람 쐬며 돈 버는 사람들이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고에 공감한다면.

그런데 그 사람들을 우리가 바꾸기는 힘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 학생들한테 권면하는 일뿐이니, 한 번 더 ‘꼰대’가 돼야겠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아픈 이들, 약한 이들, 슬픈 이들, 가난한 이들과 공감하면 좋겠다. 목디스크 때문에 며칠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 머리가 무겁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른 일로 간단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는데, 재채기할 때마다 칼 댄 부위가 너무 아팠던 경험도 있다. 아픈 일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잘 공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픈 일을 겪지 않아도 공감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경청과 공부다. 대학 교육은 전문인을 양성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교양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양이란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일 아닌가. 우리 학생들이 연세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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