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우영우는 실존하는가

김관우(경제·18)
김관우(경제·18)

 

나는 소위 ‘불편러’라 불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에게 내 불편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탈고를 진행하는 지금도, ‘연세춘추’의 한 면을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이 글을 읽고 함께 불편함에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혹은, ‘불편러’가 쓴 이 글에 대해 불편해해도 된다. 그저 이 글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글이 됐으면 한다.

나는 우영우가 불편하다. 드라마를 시청하며 한 편의 판타지 동화를 읽은 느낌이 들었다. 소수자 집단 안에서의 소수자.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1~2%의 비율만이 타인의 도움 없이 사회생활을 해낼 수 있다고 한다. ‘우영우’는 그 1~2%의 비율 안에서도 최상단에 위치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보다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건강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 냈으니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만나보게 되는 우영우를 포함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편향된 시각을 갖게 만든다.

우영우 이전에도 드라마나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접할 수 있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박정민’, 드라마 ‘굿닥터’의 ‘박시온’, ‘말아톤’의 ‘윤초원’ 등 많은 대중 매체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등장했다. ‘말아톤’이 상영된 2005년부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된 2022년까지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대중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획일화됐으며, 정형화됐다. 병명 그대로 ‘스펙트럼’이 넓은 장애임에도 대중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자폐인은 보통 웃음 포인트로 소비되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적당히 결핍된 사회성과 대인 관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 분야에서는 비장애인들을 압살하는 특출난 재능을 뽐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포함한 다양한 대중 매체 작품들은 병명과는 역설적이게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에 대한 너무나도 편협한 시각만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사회 속 일상생활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접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타인의 도움 없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포함한 획일화된 자폐를 그린 작품들만을 접하고 장애에 대한 공론의 장에 뛰어든다. 이미 우리가 참여한 공론의 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모두가 편협한 시각을 가진 눈 먼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여하는 공론의 장이 마냥 의미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한 숨 돌려 생각해보면,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소비하는 모습이 대중 매체에서 많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많은 대중들이 결핍과 불편이 있는 사람들을 희화화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사회와 대중 매체는 한층 더 성숙해졌다. 비록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역시 기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표현하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공론의 장에서의 불편함과 관심이 합쳐져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표현하는 더 나은 시도가 생겨날 것이다.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판타지 동화같다고 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는 동화 속 주인공 ‘우영우’가 아닌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만나게 될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도 ‘우영우’를 바라보듯이 바라본다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들이 ‘우영우’에 이질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자폐인과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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